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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윤정희,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

namsarang 2010. 6. 14. 05:52

[평화인]

 

영화배우 윤정희,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


하늘이 맺어 준 인연, 주님과 함께


 
   "내 생각은 이런데, 자기는 어때?"(윤정희)
 "응, 나도 똑같지 뭐."(백건우)
 "우리 둘 인터뷰 하려면 한 사람만 해도 될 거에요. 우린 대답이 똑같거든요.호호호."(윤정희)
 소녀같이 맑은 웃음소리가 인터뷰 공간을 가득 채운다. 아내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남편의 웃음소리가 왠지 화음을 만들어내는 듯 하다.
 영화배우로, 음악가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부부로서 같은 삶을 나누고 있는 있는 윤정희(데레사)ㆍ백건우(요셉마리) 부부를 만났다.

 

#반팔 러니셩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서울 한남동 연습실.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백건우씨 연주 소리가 건넌방에서 아득하게 들려온다. 윤정희씨는 남편의 연습을 감상하며 흐믓해한다.
 "저는 우리 남편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요. 음악이란 게 정해진 것이 없잖아요. 어디든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에요."
 인터뷰 시간에 맞춰 연습을 마친 세계적 피아니스트는 후줄근한 흰색 반팔 러닝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리곤 주섬주섬 남방을 챙겨 입더니 한 마리 백조처럼 차려입은 아내 옆에 우두커니 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대조를 이루는 분위기지만 그냥 그렇게 참 잘 어울렸다.

 윤씨는 1960년대 남정임, 문희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은막의 여주인공이었다. 하지만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전격 결혼한 뒤 한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살고 있다.
 결혼 후 영화 출연이 뜸했던 윤씨는 이번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시'로 16년 만에 영화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 화제 속엔 남편 백씨도 함께였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거론됐던 한국 여배우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부부라는 사실은 해외 언론들 이목을 집중시켰다. 백씨는 영화제 내내 윤씨와 동행하며 아내를 응원했다.
 "나는 음악으로 24시간 사는 사람이고, 이 사람은 영화로 24시간을 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나는 영화를 더 좋아하고 이 사람은 음악을 더 좋아하죠.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면서 그렇게 살아온 거에요. 우리 부부에겐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백건우)
 "다들 우리 부부가 어쩌면 그렇게 다정하게 지낼 수 있냐고 물어요. 난 잘 모르겠어요. 우린 그냥 남들처럼 지내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마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어서 그런가봐요."(윤정희)

 윤씨는 그동안 남편 연주회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한국 영화계에서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긴 쉽지 않았다. 16년 만에 출연한 '시'는 그만큼 특별한 영화였다. 윤씨가 영화를 찍으니 이젠 남편 백씨가 그림자가 돼줬다.
 백씨는 "아내가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했지만 우리 생활엔 새로울 것이 없었다"면서 "아내가 영화제에서 '난 한 번도 영화를 떠난 적이 없다'고 말했듯 늘 아내는 영화와 함께 였기에 생활에 갑자기 큰 변화가 생기거나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남편의 공연장엔 아내가 있었고 아내의 촬영장엔 남편이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윤씨는 "남편 음악친구들이 내 친구가 되고, 또 내 영화친구들이 남편 친구가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면서 "우린 그렇게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신앙

 서로의 영화를 보고 연주를 들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느냐는 질문에 윤씨가 대뜸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작은 안약통을 꺼내보였다. 안약통엔 '성수'라고 쓰인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아이고, 저는 천주님, 성모님 없으면 떨려서 남편 연주를 못들어요. 공연장 좌석에 앉아서 내내 묵주기도를 바쳐야 연주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니까요. 이렇게 늘 루르드 기적수를 갖고 다니면서 기도하죠. 신앙의 힘으로 버텨요."
 윤씨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침 저녁으로 성당을 옮겨가며 매일미사를 하루에 2번씩 참례할 정도로 신심 깊은 아버지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가 성수와 함께 꺼낸 손때 묻은 낡은 9일기도 책은 1986년에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것이다. 윤씨는 여전히 그 책으로 9일기도를 바친다.
 "영화 시에서 수첩에 필기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어요. 아무 말이나 끄적이면서 쓰는 척 연기하기만 하면 됐어요. 그때 나도 모르게 '전능하신 천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쓴 거에요. 무의식 중에서 기도가 나왔던 거죠."
 백씨는 "우리 부부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며 하느님과 친구처럼 지낸다"면서 "어디를 가든 꼭 성지와 성당에 들러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한다"고 아내의 말을 거들었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백씨는 결혼 후 아내를 따라 세례를 받았다.
 백씨는 "일이 잘 안되고 피아노도 잘 안쳐지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올 때 하느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굳은 믿음이었다.
 "시련이 닥치면 하느님께서 나를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 나를 좀 더 겸손하게 만들어 주시거든요."(백건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힘들 때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뭔가 더 주시려나보다 하고 생각해요."(윤정희)

 프랑스 파리에 있는 부부의 집엔 다양한 이들이 찾는다. 그 중에 고 김수환 추기경은 단골손님이었다. 또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사제들치고 이들 집을 거쳐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현재 전주교구장을 맡고 있는 이병호 주교는 프랑스 파리 신학교 유학 시절 부부의 혼인미사 증인을 서주기도 했다.
 "신부님들이 우리 집에 오는 걸 좋아하셨어요. 특히 김 추기경님은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집이 편하셨나봐요. 아니면 우리 집에 늘 김치랑 된장, 고추장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호호호. 한국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죠."(윤정희)
 백씨는 "우리 부부 사이가 편하니 집안 분위기도 편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변함없는 닭살(?)커플
 부부는 백씨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한 덕분에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정작 연주없이 둘만의 휴가를 보낸 일은 거의 없었다. 부부의 소망은 둘만의 휴가를 보내는 것이었다.
 윤씨는 "우리 둘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도 없다"면서 "책도 실컷 읽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히 휴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씨는 "이제는 좀 여유롭게 생활해도 될 것 같다"면서 "아내와 내 인생이 지금처럼 한결같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 참 잘 만났어요.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죠. 지금 우리 삶에 대해 불평하면 벌 받는다고요.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며 계속 그렇게 살려고요."

 사진 촬영을 위해 함께 걷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백씨는 자연스럽게 아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윤씨가 기자에게 "이 사람이 저보고 얼굴이 굳었대요. 내 사진 잘못나올까봐 이런다니까요. 호호호. 난 표정 안굳었는데, 나 괜찮죠?"라며 웃음을 짓는다.
 젊은 연인들처럼 길을 걸을 때도 여전히 두 손 꼭 잡고 다니는 이들에게 진부하지만 꼭 써야 할 표현이 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 천생연분(天生緣分)이다.
                                                                                                         글=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 사진=전대식 기자 jfac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