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6ㆍ25전쟁, 그리고 가톨릭교회

namsarang 2010. 6. 14. 21:43
 
 
60년 전 그날의 비국 거울로 삼아 민족 화해와 평화 위해 기도를...



   오는 25일로 6ㆍ25전쟁이 일어난 지 60돌을 맞는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겨레의 비극'은 그러나 아직도 진행형이다. 온 겨레는 평화를 원하지만, 천안함 사태로 전쟁 위기는 성큼 눈 앞에 다가와 있다. 최근 남북 관계는 긴장이 고조돼 사실상 '단절'로 접어드는 인상이다. 1995년 북녘 홍수 사태로 대북지원이 이뤄지면서 유지돼온 16년간 민족 화해와 일치 노력은 일거에 '물거품이 된 듯하다'.

 60년 전 그날 그 모습, 폐허와 무너진 성당, 북녘교회 등과 관련한 사진을 찾아 싣는 이유는 그럼에도 겨레는 화해와 일치, 하느님의 평화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20일)을 앞두고,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찍은 6ㆍ25전쟁의 참상을 특집 화보로 엮는다. 미국 뉴욕주 메리놀외방전교회 본부 어씨닝 고문서고에 소장돼 있던 1920~50년대 평양교회 사진 2500여 점 가운데서 골랐다. 6ㆍ25 전쟁 관련 사진은 10여 점에 불과했고, 전후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60년 전 전쟁 상처를 담은 사진들은 그 아프고도 아픈 겨레의 눈물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쟁 발발 60돌을 맞아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 화보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계기로 삼는다.
사진제공=메리놀외방전교회


 

▲ 1950년 9월 24일, 유엔군이 경남 진주시를 수복했을 당시 집을 잃은 피란민은 무려 6만 여명에 이르렀다. 도시의 절반 가량이 파괴됐고, 집을 잃은 난민들은 거리를 헤맸다. 폭격으로 파괴된 성당 정면은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51년 6월 진주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어느 성당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 전쟁으로 파괴된 왜관성당. 미군 로버트 그래프(Robert A. Graff)가 촬영해 메리놀회에 제공한 사진으로, 성당 정문 입구 오른쪽 벽이 허물어져 있고, 성당 전면부 곳곳엔 총탄의 흔적도 남아 있다. 성당 유리창 등도 깨져 있다. 전화를 입은 성당과 사제관을 복구, 준공 및 축복식을 가진 것은 1951년 6월 10일의 일이다.

▲ 전쟁의 폐허 속에 남겨진 아이들. 파괴된 집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아이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 뒷쪽엔 깨진 항아리와 판잣집 같은 게 세워져 있다. 정확한 촬영일자나 장소는 알 수 없지만, 전쟁 중 한국에서 찍었다는 기록은 메리놀회 고문서고에 남아 있다.

▲ 1952년 12월 북녘에서 폭격을 마치고 돌아온 미 공군 조종사들이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 현 평양시에 자리한 옛 평양교구 본당은 관후리주교좌본당을 비롯해 중화ㆍ서포ㆍ대신리ㆍ기림리본당 등이 있었다. 사진은 1950년 11월 평양 수복 직후 평양시 선교리 대신리성당에 모여든 신자들 모습이다. 대신리성당 근처에 1988년 현재의 장충성당이 세워졌다. 대신리본당 초대 주임이던 양기섭 신부는 1938년 4월 25일 본당 부설로 동평학교를 설립, 13개 학급에 1000여 명이 교육을 받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성장시켰으나 1948년 10월 공산정권에 몰수됐다. 이 사진에도 학생들이 5명이나 등장했다.

▲ 메리놀외방전교회 휴 크레이그 신부가 1928년 평남 순천군 순천읍 관상리에 건립한 한옥 성당(왼쪽)과 사제관(언덕 위)이 일부 파괴된 채로 남아 있다. 사진은 1950년 11월 유엔군이 순천에 진격했을 때 유리창 등이 파괴된 성당과 불에 탄 사제관 앞에 살아 남은 순천본당 신자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한 장면이다.

 

 

멀지만 가야할 길, 갈라진 겨레 화해와 일치의 길... 전쟁 전후해 신앙 증거하다 목숨 바친 현대 순교자들 시복시성 추진...



 

▲ 6ㆍ25전쟁 중 원산형무소에서 학살된 이광재ㆍ김봉식 신부 장례식이 원산본당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거행되고 있다. 앞쪽엔 두 사제의 시신을 담은 관이 모셔져 있고, 그 중앙에 미국 군종사제인 머피 신부, 그 곁에 당시 최명화 부제가 서 있다. 신자들은 두 사제의 유해를 원산본당 성직자 묘지에 매장하기에 앞서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 사진은 가톨릭원산ㆍ덕원신우회가 1986년에 펴낸 고 최명화(1924~75) 신부 유고집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에서 발췌했다.

▲ 1950년 9월 27일, 부산 유엔(UN)묘역에서 유 요셉(오른쪽) 신부와 미 군종신부가 군인들과 현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군을 위한 위령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이어서 공동집전을 할 수 없었기에 각기 제대에서 신자들을 등 뒤에 두고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은 지금은 보기 힘든 장면이다.

▲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헤매는 고아들을 당시 유엔에서 파견된 복지담당관이 보살피고 있다.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아이들의 가느다란 다리와 때가 덕지덕지 묻은 손, 퀭한 눈은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지만,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은 분명 60년 전 우리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전쟁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 유엔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한 미군 군종신부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세 병사들을 위한 장례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정확한 촬영일자는 알 수 없다.

▲ 1952년 11월 28일, 미국 주교회의 가톨릭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에드워드 E. 스완스톰 몬시뇰이 뉴욕의 한 창고에서 한국전쟁 부상자와 유족들에게 보낼 식량과 물자들을 점검하고 있다. 포대엔 십가가 표기와 함께 '미국 가톨릭 구제회'라고 쓴 한글 글씨가 영문과 함께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구호식량은 1950년 11월 23일 추수감사축제를 통해 모은 이 구호식량은 유럽과 아시아, 중동에 보낼 구호물품의 일부였다.






   1950년 10월 8일. 북진한 국군에 밀린 공산군은 당시 원산형무소(교도소)에 갇혀 있던 300여 명을 형무소 내 방공호에서 학살한다. 그 안에 당시 양양본당 주임이던 이광재(디모테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 성직수사 김봉식(마오로) 신부가 포함돼 있었다. 원산본당 청년들은 공산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이 신부와 김 신부 유해를 방공호 뒷산에서 찾아내 원산본당 사제관 뒤 성직자 묘지에 안장한다.

 이처럼 숱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6ㆍ25전쟁 광풍 속에서 희생됐다. 그리스도를 따라 '뼛속까지 진정한 사제이자 목자로' 산 장한 순교 사제들은 이제 가고 없지만, 그 순교 얼은 살아남아 한국천주교회를 지킨다.

 이같은 순교의 얼을 기리고 그 순교신심을 내면화함으로써 실천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국천주교회는 지난해 주교회의 봄 정기총회 결정에 따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박정일 주교)를 통해 이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대교구(가르멜수녀회 및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순교자 포함)를 비롯해 평양(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순교자 포함)ㆍ대전ㆍ수원ㆍ인천ㆍ광주ㆍ제주교구 등 각 교구는 20세기 초 순교자와 6ㆍ25전쟁을 전후해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바친 현대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이를 취합해 11월까지 시복시성주교특위에 제출키로 했다.

 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위는 이를 토대로 시복시성을 추진할 순교자들의 명단을 선별 확정키로 했다. 다만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Josef, 73) 주교아빠스 등 성 베네딕도회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교구(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포함) 순교자 36위 시복시성 작업은 시복시성주교특위와는 별도로 추진되고 있다.

 민족과 교회에 엄청난 고통을 안긴 6ㆍ25전쟁은 그뒤로도 질곡의 역사를 낳았다. 이미 해방 이전부터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북녘교회는 거의 말살되다시피 했다. 함흥교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 서울대교구(황해도), 춘천교구(3ㆍ8선 및 휴전선 이북)도 박해에 직면, 해방 당시 5만7008명(「1944년 한국천주교회 교세통계」)에 이르던 북녘 교회는 공산 치하와 전쟁기를 거치며 거의 와해됐다.

 1988년 이후에야 이른바 '조선천주교인협회(현 조선가톨릭교협회)'와 '장충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재차 북녘에 등장했지만, 그 뒤로도 20여 년이 지나도록 보편교회와 일치는 여전히 요원해 안타깝기만 하다.

 남북 간 300만 명이 넘게 사망하고 폐허와 서로를 향한 증오만 남긴 동족상잔 전쟁은 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을 맞고 있는데도 우리 가톨릭교회에 겨레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계속 요청하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은 멀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할 길은 화해와 일치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메리놀외방전교회
출처 : 세포네
글쓴이 : 세포 원글보기
메모 : 귀중한 자료 올려주신 세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