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2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namsarang 2010. 6. 15. 22:44

[6·25 60주년][미니 戰史]

(2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 넘게 지속됐다. 협상 중에도 유엔군과 공산군은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다. 양측은 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을, 중·동부를 중심으로 한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을 벌였다. 전투는 휴전협상 전체를 파국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협상이나 이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제한공격'에 초점이 맞춰졌다.

유엔군은 공산군측이 협상을 고의로 지연시키려고 하거나, 유엔측 요구 조건을 공산군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곤 했다. 공산군측을 스스로 협상테이블에 나오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공산군측의 계산은 달랐다. 회담으로 조성된 전장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그동안 형편없이 붕괴된 그들의 군사력을 정비한 후에 유엔군을 압박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산군측은 한반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유엔군이 과감한 양보를 거듭해 결국 적당한 선에서 휴전에 응해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양측의 이해관계와 계산법이 어긋나면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휴전회담도 '결렬과 재개'를 반복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서부전선에서의 충돌은 자제했다. 유엔군은 서부지역에서 공세를 감행한다면 휴전회담장이 있는 개성이 포함돼 또 한 번 전면전으로의 확산과 휴전회담의 무산 가능성을 우려했다. 공산군 역시 서부전선에서 싸운다면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애초에 휴전회담장을 개성으로 정하고 서부전선에서의 확전을 회피했다. 결국 전선은 중ㆍ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병력숫자 면에서는 여전히 열세에 있었지만, 화력과 기동력은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전장이 해발 1000m 이상의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제한되면서 유엔군은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양측은 공격과 방어, 후퇴와 역습을 반복하는 고지쟁탈전에서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치러진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으로는 펀치볼 전투(1951년 7월),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9월),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9~10월), 백마고지전투(1952년 10월·사진·백마고지전투때 아군이 사용한 포탄의 탄피), 저격능선 전투(1952년 10~11월) 등을 들 수 있다.

휴전협상 개시 때 아군의 접촉선은 임진강 하구~화천 저수지~속초를 연결하는 '캔자스선'이었다. 이 선은 38도선 북방 10~20km 북방을 연하는 선이었다. 그러나 아군은 중부전선의 적 전투력 근원지인 철의 삼각지(철원-김화-평강)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 북방에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적을 압박했다. 그래서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이곳에서의 전투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