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조선일보 특별취재팀 엮음|기파랑|336쪽|1만5000원
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6·25에 대한 망각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6·25를 말하는 것 자체가 고루하게 비치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은 수상한 시류(時流) 탓도 없지 않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다시 한 번 보라. 전쟁의 진실과 책임 문제에 대해 많은 부분이 여전히 수박 겉핥기다. 10~20대의 절반 이상이 6·25 전쟁의 발발 연도를 모르게 된 것은 결국 6·25를 충분히 혹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기성세대 잘못이다.
이처럼 허망하게 잊혀가는 6·25전쟁을 더 늦기 전에 육성(肉聲)을 통해 되살리려는 책이 바로 '나와 6·25'다. 이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나'다. 그 가운데는 직접 전쟁을 체험한 '나'도 있고, 조부모나 부모세대의 경험을 물려받은 '나'도 있다. 당시 군인이었던 '나'도 있고, 촌부(村婦)였던 '나'도 있으며,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외국인 '나'도 섞여 있다. 보통사람인 '나'가 대부분이지만, 추기경이나 장군·연예인처럼 유명한 '나'도 들어 있다. '나와 6·25'는 이처럼 다양한 '나'가 겪은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간증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지난 석 달간 신문에 연재될 때도 느꼈지만 책으로 묶인 것을 접하며 또다시 슬펐다. 직업상 보통 사람들보다 냉정한 '기자들을 울게 할 정도'로 너무도 아픈 얘기가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80세의 어떤 할머니는 60년 전 자신의 고향을 '살인 지옥'으로 회상하면서 전쟁이 끝나고도 30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셋째 아들은 3형제 가운데 위의 둘을 나라에 바치고 난 다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니는 효도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 인민군에 의해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워 도망쳤다는 막내딸은 지금도 울고 있다.
책에는 더러 재미있거나 우스운 얘기도 실려 있다. 북한군이 쏜 야포 파편 2개를 평생 왼쪽 뒷머리 속에 넣고 살고 있다는 82세 할아버지는 아무데서나 머리를 손질할 수 없어 두 살 위의 이발사에게 55년간 자신의 머리를 맡겼고 두 사람은 형제처럼 살고 있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휴전협정이 발효된 직후, 강원도 화천 북방 금성천에서는 국군·유엔군·북한군·중공군이 함께 목욕하고 물장구를 쳤다는 기록도 참으로 인간적이다.
중공군의 포로로 잡혔던 영국인 참전 용사는 아직도 중국 식당에 들어가면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아 무섭다고 말한다. 콜롬비아의 참전 군인은 정작 무서웠던 것은 중공군이 아니라 한국의 겨울이라고 말한다. 당시 한국을 도왔던 많은 외국 군인들이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마당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비자 받기가 까다롭다고 말하는 필리핀 참전 용사에게는 한국 정부를 대신해 사과하고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들은 전쟁의 기억을 토로함으로써 비로소 전쟁의 족쇄로부터 풀려나는 해원(解寃)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새벽 두시에 원고를 보낸 81세 할머니는 "이제 한 짐 덜고 저 세상으로 가볍게 가겠다"고 적었다. 6·25 전쟁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의 몫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의 궁극적인 주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