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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공산 치하 석 달

namsarang 2010. 6. 29. 23:12

[ESSAY]

내 어릴 적 공산 치하 석 달

  • 이경식 전 코리아헤럴드 문화부장
      ▲ 이경식 전 코리아헤럴드
          문화부장

6·25때 공산치하 3개월을 겪은 서울 시민들은
北에서 온 '지도원 동무'란 단어를 기억한다
南출신 기관장 대신 실제 권력을 쥐었고
곡물 한알 한알 세며 현물세를 받아간 게 그들이다
농민들은 '이건 아니다'고 했다
북한 통치에서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와 진보세력은
공산 정치 실체를 아는가

6·25 남침 때 피란 가지 못하고 9·28 서울수복때까지 3개월간 공산치하에서 고통받은 당시 서울시민에게는 잊을 수 없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지도원 동무'입니다.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타계했거나 살아 있어도 80세 전후입니다. 당시 18세였던 나도 이미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지도원 동무'란 말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북한의 '지도원'은 말하자면 북한이 임명·파견한 각급 조직의 실질적인 장(長)입니다. 공산 치하의 서울에선 각급 인민위원회(지금의 각급 행정기관에 해당) 등 모든 권력기관장은 형식적으로는 남한 출신 지방 좌익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남한 출신 위원장에는 예외 없이 북한이 파견한 '지도원'이 따라붙었습니다.

남한 출신의 장(長)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실제의 권력은 북한에서 파견된 '지도원'이 행사합니다. 아마도 남한이 완전히 적화(赤化)가 됐다면 남한 출신의 좌익 지도층은 박헌영처럼 숙청되고 지위가 낮은 남한 출신은 영원히 '제2국민'이 됐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파견된 '지도원'이란 사람들은 농촌에서도 쌀과 곡물 줄기에 달린 낱알을 한 알 한 알 셌습니다. 모든 벼가 다 잘 자랄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계산해 농민들로부터 '현물세'를 받아 갔습니다. 그래서 '현물세'를 내고 나면 남는 곡식이 없었습니다. 공산치하 3개월에 남한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이건 아니로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당시 서울에선 17살 이상의 젊은 남녀는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의용군'으로, 처녀는 '간호병'으로 끌고 갔습니다. 나는 키가 작고 동안(童顔)이라 '의용군'을 면했는데 막판에는 그것도 안 돼 산속에 숨어 화(禍)를 면했습니다.

그 치하에서는 부부도 서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아내 앞에서조차 마음속의 말을 다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로동신문, 인민일보, 민주조선 등 신문을 보면 내용이 다 똑같았습니다. 먼저 김일성의 동정이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1면에 나오고, '영용한 인민군대'의 '혁혁한' 전과, 북한 로동자와 농민의 '생산 목표 120% 초과 달성' 등등의 기사가 거의 전 지면을 채웠습니다. 개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나 동네 기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독자는 답답하고 질식할 정도입니다. 북한의 신문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오늘날 남한의 좌익 또는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이런 신문을 하루만 봐도 진저리를 칠 것입니다.

당시 3개월간 공산 치하에서 살아본 남한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렸고 그 때문에 남한의 좌익이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이와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공산 정치의 실체를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치하에서 살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천안함사건이 진행 중인데도 적전분열(敵前分裂)을 합니다. 북한이 악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섬뜩하고 아찔합니다. 해방 직후 미 군정 때와 어쩌면 그렇게 같습니까. 당시는 좌익 지지자들이 우익 지지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특히 청년층은 좌익이라고 해야 '인텔리'로 통했으니까 너나없이 좌익행세를 했지요.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도 채 안 돼 '노동자의 천국' '토지 무상분배' 같은 공산당 선전이 잘 먹혀들어갔습니다. 당시엔 말로만 공산당을 알았을 뿐 실제 그들의 통치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북한의 로동신문, 인민일보, 민주조선 등 북한 신문을 직수입하게 하여 남한의 젊은이들과 좌익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아마도 1~2개월만 보게 하면 진보의 단꿈, 그리고 막연히 동경한 체제에 대해 환멸을 느낄 것입니다. 이들을 북한에 보내 장기 체류하면서 북한을 '실습'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북한이 체제 선전을 위해 좋은 것만 보이려고 하겠지만 다 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북한이 좋다고 한다면 아주 그곳에서 살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공산치하에서 3개월을 겪은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들이야말로 공산 치하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 가서 남한에서 했던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크게 발전하여 이제 나라가 북한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곧 사라질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일은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합니다. 올해가 6·25 전쟁 60주년입니다. 공산당 치하 3개월간 몸서리치게 했던 '지도원 동무'라는 그 말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도 생생합니다. 제발 모든 사람이 북한 체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꿈에서라도 우리 국민이 노예와 같은 처지가 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