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게시판

이념 과잉의 시대를 개탄한다

namsarang 2010. 7. 1. 23:39

[아침논단]

이념 과잉의 시대를 개탄한다

  • 윤영관 서울대 교수
윤영관 서울대 교수

美·中을 함께 품고 北을 원칙 있게
포용하자는 필자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사색당쟁으로 망했던 역사가 생각나는 요즘

"지옥에 이르는 길은 수많은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서양인들이 즐겨 쓰는 경구(警句)이다. 대단히 선한 이상과 이념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엉뚱하게 정반대로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회주의도 원래 좋은 이념이었다. 그러나 그 이념을 실현하겠다고 혁명까지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 결과는 참담했다. 경제는 망가지고 독재자들의 손에 수천만의 무고한 인민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함께 못살게 되었다는 점에서 평등해지기는 했는데 결국 무의미한 평등이 되어버렸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모든 동구권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버렸을 때, 세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승리했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마저도 방종으로 흐를 때 파국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모든 이념은 완벽하지 않다. 그 완벽하지 않은 이념을 지나치게 지고(至高)의 선(善)으로 간주하고 숭배할 때 그 사회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심지어 월(Wall)가의 성공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마저도 시장 메커니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준다는 맹신이 위험한 생각이라고 경고해왔다. 그의 스승인 저명한 사상가 칼 포퍼는 어떤 이념이 되었든, 이념에 대한 집착이 '열린 사회의 최대의 적(敵)'임을 갈파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이념 과잉이 위험수위를 치닫고 있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 갈등이 격화되고 상호 간에 증오의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차가운 논리로 당면 과제에 대해 구체적 해법을 모색하려는 노력은 정작 실종되고, 사회는 끝없이 표류한다.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 논쟁은 과연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울 정도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필자는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사회 영역의 권력이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어 상호 견제하는 메커니즘이 정착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대통령을 직접 뽑는 절차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권력분산과 상호견제가 제도화되지 않아 정경(政經)유착이 극심했고 경제부문에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여 결국 IMF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정치 개혁이 필요한데 북한처럼 불안정한 이웃과 함께하는 상황에서 개혁에 성공하려면 안정적인 외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필자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안정된 외교를 모색해나가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풀어나가는 데는 군사동맹이자 휴전협정 당사국인 미국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지정학적으로 이웃이고 경제적 영향을 크게 미치며 북한의 후견국인 중국과도 긴밀한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문제는 어떤 구체적 전략과 전술로 미국과 중국을 함께 품어 안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것인가의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럼 한·미동맹과 중국을 동시에 강조하는 필자는 친미(親美) 보수인가, 아니면 친중(親中) 진보인가?

북한 문제를 풀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고 천안함을 공격하고 하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북한이 냉전 종결 이후 세계정세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그럴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세계사의 흐름에 제대로 적응하게 하는 해법은 결국 이들을 포용해서 국제사회로 끌어내고 외부와의 접촉의 면을 넓혀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포용은 하되, 시장원리나 비핵화, 인권과 같은 세계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도록 촉구 유도한다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포용'과 '원칙' 간의 조화와 균형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모색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필자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한반도 상황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감정과 큰 목소리의 명분론이 아니라 냉철한 논리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법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역사의 먼 훗날, 자손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사색당쟁으로 날 새다가 나라를 망치게 한 조선시대 조상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에 자꾸 오버랩 되는 것은 필자만의 지나친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