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전쟁이 터지자… 그 마을에선 왜 서로 총을 겨눴나

namsarang 2010. 6. 30. 20:06

전쟁이 터지자… 그 마을에선 왜 서로 총을 겨눴나

 

6·25 당시 주민 간 학살 추적한 연구서 '마을로 간 한국전쟁'
"신분제·지주제·씨족 갈등… 격렬한 충돌로 폭발한 것"

'한국전쟁기 지역에서의 충돌은 계급 갈등이나 이념 대립에서 빚어졌다기보다는 친족·마을·신분 간의 갈등이 더 중요했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인 박찬승(53) 한양대 교수는 지난 10년간 6·25전쟁 당시 보통 사람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듣기 위해 시골 마을을 돌아다녔다. 최근 나온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은 지역 주민들의 구술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마을 차원의 6·25전쟁 연구서다. 이 책은 주민 간의 학살을 낳은 갈등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한다.

공산당 치하에서‘인민재판’은 무고한 주민을 학살하는 수단이 됐다. 6·25는 이념과 계급 못지않게 친족·마을·신분 간 대립이 폭발한 전쟁이었다.
연구 대상은 진도 X리, 영암 영보리, 부여의 동족마을 A와 B, 당진의 합덕면, 금산군 부리면 등 5곳이다. 일부 지역은 익명으로 처리해야 할 만큼,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깊숙이 남아있다.

현풍 곽씨 동족마을인 진도 X리는 집안끼리 좌우로 갈리어 전쟁 몇 달 만에 16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는 친족 집단 내의 치열한 경쟁의식이 한몫했다. 선조 때쯤 X리에 정착한 현풍 곽씨들은 크게 장(長)파, 중(仲)파, 계(季)파로 나뉘는데, 역사적으로 중파가 X리를 이끌었고 계파는 열세였다. 특히 일본강점기 X리가 속한 군내면 면장은 장파와 중파가 도맡았고 계파는 면장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광복 직후 중파가 좌익에, 계파가 우익에 서면서 갈등은 증폭됐고 6·25전쟁은 보도연맹원 처형, 인민군 진주 후 우익 학살, 수복 후 부역자 처형의 악순환으로 이 마을을 집어삼켰다.

책은 양반 마을과 평민 마을이 충돌한 부여, 마을 공동체의 결속력은 강했으나 좌파 지도자들을 다수 배출하면서 6·25전쟁 이후 급격히 세를 잃은 영암의 양반마을 영보리, 지주·마름과 소작인 간의 갈등과 종교 충돌이 중첩된 당진 합덕면, 두 명문 양반가가 충돌한 금산 부리면 사례로 이어진다.

금산 부리면은 28개 마을이 대부분 동족마을로 양반 집안인 길씨와 양씨가 경쟁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해방 이후 길씨는 주로 좌익으로, 양씨는 우익으로 기울어졌지만 두 집안이 사돈관계 등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 때도 커다란 충돌이 없었다. 1950년 11월 인민군이 물러난 뒤 우익들이 면민 대회를 열었다가 빨치산의 습격으로 78명이 살해됐다. 양씨 집안이 주로 피해를 입었고 길씨 집안도 일부 포함됐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주도한 학살 이후에도 두 집안은 서로를 감싸줬다. 집안과 가문, 인척관계가 이념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다.

박찬승 교수는 "6·25전쟁 이전 한국 사회는 신분제, 지주제, 씨족 간 갈등, 마을 간 갈등 등으로 갈등 요소가 대단히 많은 사회였고 한국인들은 이런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격렬한 충돌과 반복적인 학살로 나타났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