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정훈 사회정책부장
불법 방북한 한상렬 목사는 평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직함을 지닌 그는, '진보'는커녕 시대착오적인 북한 맹종자(盲從者)였다. 인권과 자유를 주장하는 자칭 진보주의자가, 지구 상에서 가장 수구적이고 폭압적인 북한 정권을 칭송하며 남쪽을 '역적 패당'이라 저주한다. 이런 기막힌 '블랙 코미디'를 보며 많은 사람이 한 목사에게 "그냥 그곳에 남으시라"고 권하고 있다.
국민은 한 목사 부류 수구 좌파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주와 통일을 내세우며 아무리 대한민국을 흔들어대도 대다수 국민은 냉담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며 평택 미군기지 반대며, 한 목사와 주변 친북세력이 기획한 사회 선동은 대중적 지지 동력을 얻지 못하고 대개는 '그들만의 푸닥거리'로 끝났다. 단 하나의 예외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 예외란 광우병 촛불사태다. 2년 전, 나라를 뒤흔든 광우병 정국의 숨은 주역은 한 목사가 주도해 만든 한국진보연대 세력이었다. 촛불 점화가 'PD수첩'의 왜곡보도에서 시작됐다면, 도심을 마비시킨 대규모 시위로 확산시킨 것은 진보연대였다. 지금 평양에서 북한 찬미에 여념 없는 한 목사와 그의 진보연대 동료들이 광우병 광풍(狂風)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2년 전, 50여 차례 이어진 광우병 시위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주관 아래 조직되고 진행됐다. 광우병 대책회의에는 1500여개 단체의 이름이 올려져 진보·좌파의 제(諸)정파가 망라된 듯한 모양을 갖췄다. 하지만 이는 겉보기일 뿐, 실제 대책회의는 좌파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고 반미·친북 성향이 강한 진보연대가 지배했다. 한 목사 그룹의 진보연대가 광우병 시위를 사실상 주도한 것이다.
조직부터 그랬다. 광우병 대책회의의 정책·조직·선전·기획·재정 등 주요 보직은 대부분 진보연대 인사로 채워졌다. 진보연대 대외협력위원장이 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을, 진보연대 사무처장이 대책회의 사무처장을, 진보연대 조직위원장이 대책회의 대변인을 맡는 식이다. 진보연대 조직이 그대로 대책회의로 옮겨간 셈이었다.
당시 검찰 공소장을 보면 이런 대목도 있다. 대책회의의 후원 계좌 5개는 모두 진보연대 인사 명의로 개설됐고, 대책회의의 이메일(antimadcow@) 역시 한 목사 명의로 만들어졌다. 공소장은 한 목사가 오종렬 진보연대 상임대표와 함께 주요 사업계획을 승인하고 지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기재했다. 한마디로 '광우병 대책회의=친북 진보연대'였고, 한 목사와 오종렬·박석운 등 진보연대 3인방이 그 수뇌부였다.
한 목사와 진보연대가 장악한 대책회의는 두 달여 동안 거의 매일같이 조직적인 도심 시위를 기획했다. 투쟁전략을 설정하고, 가두 무대와 집회 시나리오, 시위구호를 만들었으며, 계란 던지기 같은 온갖 이벤트를 고안해냈다. 가두 방송차량이며 피켓·플래카드·유인물·스티커 등 시위용품을 준비한 것도 대책회의였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우리 정부를 '천안함 살인의 원흉'으로 부르는 사람들의 조직적 기획에 의해 두 달간 요동쳤다. 반미·반정부 투쟁을 펼쳐온 한목사와 그 동료들이 광우병이라는 호재에 절묘하게 올라탄 것이었다. 국민으로부터 줄곧 외면당해왔던 한 목사 그룹이 대중에게 가장 다가갔던 시기이기도 했다.
광우병이 걱정돼, 혹은 정부 협상에 분노해 거리에 나왔던 대다수 시민은 집회가 한 목사 같은 친북 세력에 의해 진행됐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춤추었다는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광우병 사태의 '불편한 진실' 한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