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 인사이드] 여자복싱 4대기구 통합 챔프 도전하는 김주희
요양병원 아버지 모시며 틈틈이 베푸는 생활 교육학 석사 과정까지
땀 냄새가 시큼했다. 샌드백이 파열음(破裂音)을 내며 울었다. 서울 영등포구 거인체육관을 이런 풍경으로 바꿔놓은 김주희(24)가 말했다. "1년 만의 경기라 설레요." 한국 여자 프로복싱 사상 첫 복서인 그가 9월 4일 새 도전에 나선다. 상대는 필리핀의 주제스 나가와다. 그를 이기면 WIBA·WIBF·GBU 타이틀에 이어 WBF(세계복싱연맹) 라이트플라이급(48.98㎏ 이하) 챔피언 타이틀을 추가하게 된다. 4대 기구 통합 왕자(王者)가 되는 것이다. ■무서웠던 가난
초등학교 4학년 생일 아침상에 케이크가 올라왔다. "왜 엄마가 아침부터 이걸…." 소녀는 궁금해하면서도 맛있게 케이크를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저녁에 보자"고 했다. 엄마는 그날 이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구두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충격으로 누워버렸다. 지금은 세계적인 돌주먹이 된 소녀가 말했다. "쌀은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고요. 너무 배고파 구멍가게에서 빵도 훔치고 그랬어요. 나중에 배로 갚아 드렸지만…."
- ▲ 김주희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간 그날 저녁 훈련을 거를 수 없다며 서울로 돌아온‘독종’이다. 그는“팬들이 즐거워할 만한 화끈한 복싱을 보여 드리겠다”고 말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복싱을 하면서도 돈은 계속 벌어야 했다. 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2002년 월드컵이 김주희에겐 잊고 싶은 시간이다. "이탈리아와 16강전이었을 거예요. 그날만 닭을 100마리 이상 튀겼어요. 온몸엔 덴 자국이었고요."
■근성으로 이겨내다
못 먹은 김주희는 빈혈이 심했다. 문래중학교 시절 육상부에서 활동할 때도 걸핏하면 쓰러졌다. 2002년 허리 디스크 때문에 병원에 가니 의사가 말했다. "적혈구 수치가 일반인의 4분의 1 수준이야! 피가 아니라 물이네…."
- ▲ 김주희는 오른쪽 엄지발가락 뼈를 1.5㎝ 가량 잘라내 지금도 절뚝거리며 걷는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하지만 시련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이번엔 발가락 골수염이었다. 오른쪽 엄지발톱이 빠진 후 치료를 하지 않고 미련하게 연습한 결과였다. 김주희는 엄지발가락 뼈를 1.5㎝나 잘라냈다. 정 관장이 그를 업고 병원에 다녔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술받고 1년 후면 70% 정도 회복한다는데, 전 40%밖에 안 됐어요. 어릴 때 영양 공급이 제대로 안 돼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선 당장 운동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복싱을 놓으면 모든 걸 놓는 거니까요. 어릴 땐 챔피언이 되면 돈 많이 벌어 집안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어요. 엄마도 다시 찾아올 줄 알았어요.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복싱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절뚝거리며 연습하다 왼쪽 발목 인대가 늘어났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지난해 서울에 25㎝의 폭설이 왔을 때 아픈 다리를 끌고 혼자 체육관에서 연습하던 그다. 2007년 김주희는 WBA 챔피언이 됐고 지난해 3대 기구를 석권했다.
■어려운 사람 돕는 '복싱 천사'
김주희는 올해부터 중부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이번 학기 학점은 3.5. 뭐든 대충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드러난다. 남자친구는 사귀어 본 적도 없고 고교 수학여행 때 딱 한 번 맥주 한 모금 마셔본 그다.
"곱게 화장한 친구들을 보면 어른 같아요. 옛날엔 안 꾸며도 예쁘단 소리를 들었는데 이젠 관장님이 좀 꾸미고 다니라고 구박해요. 근데 화장을 해 본 적이 있어야죠." 이번 타이틀전의 대전료는 4000만원이다.
열악한 국내 복싱 환경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뇌출혈로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 병원비 등으로 생활은 빠듯하다. 그래도 김주희는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강원도 홍천의 장애인 시설인 삼덕원을 수시로 찾아 옷과 신발을 선물하고 어려운 학교 복싱부에 용품과 의류 등을 보내기도 한다. 정 관장이 "수입의 반 이상을 내 놓는 것 같다"고 하자 김주희는 "큰일 아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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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희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간 그날 저녁 훈련을 거를 수 없다며 서울로 돌아온 ‘독종’이다. 그는 “팬들이 즐거워할 만한 화끈한 복싱을 보여 드리겠다”고 말했다./전기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