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참고

이혼

namsarang 2010. 8. 7. 16:02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70]

이혼

  •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 1792년 9월 20일, 프랑스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침략해 들어온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프랑스군이 격파한 발미(Valmy)의 전투가 있던 날, 파리의 입법의회 의원들은 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을 단 한 시간 만에 깨뜨리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혼제도가 성립된 것이다.

    결혼을 '해소할 수 없고 파기할 수 없는' 성사(聖事)로 만든 것은 가톨릭교회였다. 원래 초대 교회는 가급적 결혼과 육체관계를 피하고 정결하게 살 것을 권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인류가 멸망하지 않겠는가? 이 문제를 정리한 것이 11세기의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이었다. 이에 의하면 성직자는 금욕의 규칙을 준수하고, 일반 신도는 결혼을 하되 교회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는 '기독교적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결혼은 일부일처제이고 양자의 동의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도중에 해소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에 의하면 이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혼 불가(不可)의 원칙이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 더 이상 함께 살기 힘든 부부가 어쩔 수 없이 황량한 결혼생활을 해야 했고, 또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 사이에서 아이들이 괴로워하며 살았다. 이런 점을 거론하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교회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런 움직임이 혁명 상황에서 결실을 본 것이 1792년의 법률이었다. 이제 결혼은 민법상의 계약이 되었고 이혼의 가능성도 열렸다. 그러자 이혼 사태(沙汰)가 벌어졌다. 조만간 파리에서는 이혼 건수가 결혼 건수보다 많아졌다. 심지어 두 자매와 차례로 결혼과 이혼을 한 후에 장모와 결혼하려 한 사람까지 생겨났다. '혁명의 지나침'은 다시 반동을 불러와서 왕정복고기에는 이혼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가, 1884년에 다시 이혼을 허가하는 나케(Naquet)법이 가결되어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이혼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숨 막히는 사회가 되고, 현재 우리 사회처럼 너무 과하면 모든 것이 불안정해진다. 이 역시 적절한 균형이 필요할 터이나, 그 전에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 이혼이 사라질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