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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지식인의 사명

namsarang 2010. 8. 14. 19:19

[박세일 칼럼]

'민주화 이후' 지식인의 사명

  • 박세일·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지식인의 사명이 비판이던 민주화 이전 시대는 갔다
이제는 지적으로 정직하고 나라 갈 길에 대한
공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사회에 진 빚 갚는 길

근로자들이 공장에서 땀을 흘릴 때, 농민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힘든 농사를 지을 때, 시원한 곳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지식인들이다. 이들 지식인들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지금 먹고 있는 음식도 자신이 재배한 것이 아니다. 이웃 근로자와 농민의 땀과 노력 덕분에 자신들의 생활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지식인들은 이웃 근로자들과 농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이웃에 진 빚을 갚아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지식인의 사명(使命)의 문제이다. 그동안 '민주화 이전'의 시대에는 지식인의 주된 사명은 권력비판과 사회고발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과 사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엄하게 꾸짖는 지식인의 비판정신과 지적 용기를 높이 존경하여 왔다. 지난 기간 지식인들은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으로 이웃에 진 빚을 갚아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민주화 이후', 21세기 '선진화 시대'를 맞고 있다. 이 새 시대에 걸맞은 지식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성찰이 부족하다. 지금도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인 무절제한 권력비판의 전통이 강하다. 무조건 권력과 정부를 비판하고 사회를 비난하는 것이 선(善)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심지어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 나타나듯, 일부 지식인들은 정권비판을 위해 객관적 사실과 진실도 외면하는 반(反)지성(知性)의 모습까지 보였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공인(公人)으로서의 지식인(public intellectuals), 우리가 존경하던 올곧은 선비가 아니다.

그러면 '민주화 이후' 시대 지식인의 사명은 무엇일까. 이제는 권력에 대한 무한비판에서 공동체에 대한 무한사랑과 책임감으로, 단순한 비판정신에서 대안제시와 책임정신으로 바뀌어야 한다. 반(反)권력의 '지적 전투성'이 아니라, 진실을 존중하는 '지적 정직'과 공동체 사랑이라는 '지적 윤리'가 보다 강조돼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지식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변화와 이 나라가 처해 있는 국내외 어려운 사정을 국민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격변의 초(超)세계화 시대, 동북아 신질서 시대에,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밤잠을 설치면서라도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한마디로 21세기 '선진화 시대' 지식인의 사명은 '국가가 나아갈 길'에 대한 올바른 공론(公論)을 세우는 데 있다. 여기서 공론이란 사회의 지배적 견해인 여론이나 다수의 견해인 중론(衆論)과는 다른 개념이다. 공론은 전문 지식인들이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공동선을 위해 노심초사 심사숙고하여 제시한 견해이다. 그래서 공론은 단순한 여론(public opinion)이 아니고 그 시대 집단지성의 공적 판단(public judgment)이고, 한 시대를 끌고 갈 정론(正論)이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 공론이 바로 서야 한다. 국가운영이 인기 영합적으로 일시적 여론과 중론에 따라 수시로 흔들려선 안 된다. 그래서 이율곡 선생께서는 먼저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비(非)전문가들의 속설인 소위 부의(浮議)를 경계하셨다. 그리고 나라 운영은 반드시 원칙과 도리에 맞는 공론에 따라 할 것을 주장하시며, "공론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공론이 항간에 있으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만약 위아래 모두 공론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공론이야말로 나라의 원기(元氣)이고, 이 공론을 세우는 것이 바로 사림(士林) 즉 선비의 사명이다." 환언(換言)하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하셨다.

이제 권력과 사회비판만이 지식인의 사명인 시대는 갔다.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위해 올바른 공론을 세우는 일이 지식인의 주된 사명이 돼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 부족이 아니라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공론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데 있다. 지식인의 전투성 부족이 아니라 지적 정직과 성실, 공동체 사랑과 애국심 부족이 문제이다. 오늘의 지식인들은 시대 변화를 읽고 자신들이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분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