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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잃은 상처 딛고 세상에 퍼뜨린 '사랑'

namsarang 2010. 8. 22. 21:20

딸 잃은 상처 딛고 세상에 퍼뜨린 '사랑'

4년 前 '용산 초등생 피살사건' 허미연양 부모, 범죄로 고통받는 사람 도와
"슬픔이 분노가 되지않게" 10년간 1억원 기부 약속… 사연들은 시민들도 동참

궂은비가 내리던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아름다운재단 사무실 '아름다운 집'에 하얀 봉투가 배달됐다. 봉투 안에는 김기연(가명)씨가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김씨는 재작년 오토바이 소매치기를 당하면서 크게 다치고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실의에 빠진 김씨를 일으켜 세운 건 아름다운재단이 작년 전해준 '미연이의 수호천사 기금' 200만원이었다. 김씨는 편지에서 "미안함과 쑥스러움 속에 그분의 마음을 전해들었어요. 고마운 마음에 '열심히 살자'고 나 자신과 약속했어요"라고 썼다. 그리고 "정말 정말 힘들 때 제게 도움을 주신 아름다운 분을 생각해서라도 약해지지 않겠습니다"라고 글을 맺었다.

지난 2007년 3월 조성된‘미연이의 수호천사 기금’협약서. 허씨 부부는 자신들의 기부가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꺼려 사진촬영에도 응하지 않았다. /아름다운재단 제공
미연이의 수호천사 기금은 2006년 2월 17일 '서울 용산 초등생 피살사건'으로 딸 미연(당시 11세)양을 잃은 허모(43)씨 부부가 만들었다. 비디오가게 주인 김모(57)씨가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러 간 미연양을 유인해 성폭행하고 시신마저 유기하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사건이었다.

사건 1년 뒤인 2007년 봄 허씨 부부는 아름다운재단을 방문해 범죄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금을 기탁하겠다고 약속했다. 허씨 부부는 "슬픔이 분노가 되지 않도록 작은 실천을 하려 한다"고 했다. 외동딸 미연양이 세상을 산 시간인 10년 동안 매년 1000만원씩 모두 1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허씨 부부는 약속을 지켜나갔다. 매년 미연양 기일인 2월과 여름휴가철이 되면 500만~1000만원씩 꼬박꼬박 기부했다. 미연양 부모의 사연을 들은 수많은 시민도 기부 대열에 동참했다. 시민 28명이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고 그 중 10명은 정기적으로 미연이의 수호천사 기금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기부도 줄을 이었다. 네이버 '해피빈'을 통해 100원·200원씩 기부한 네티즌들은 2000여명에 달했다. 이렇게 십시일반 모인 기금이 4년 만에 5000여만원이 됐다.

아름다운재단은 지금까지 미연이의 수호천사 기금으로 1가구당 최대 200만원씩 18가구에 3500만원을 지원했다. 이들 중에는 연쇄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가게를 운영하다 돈을 뺏기고 살해당한 아주머니 가족이 포함돼 있다. 아름다운재단과 한국범죄피해자지원 중앙센터가 1년에 8가구씩 수혜가구를 선정했다.

허씨 부부는 자신들의 기부가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 하지만 기부가 계속되는 동안 허씨 부부의 상처도 서서히 치유되는 모습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재단 관계자는 "'미연이'라는 이름을 꺼내기도 어려워했던 허씨 부부가 '정이 많고 나눠주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딸아이를 추억하기도 했다"며 "허씨 부부가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도 꺼내며 심리적으로 상당히 안정되고 있다"고 전했다. 허씨 부부는 아름다운재단에 이메일을 통해 "요즘 너무나 많이 벌어지는 아동 성폭력 사건기사를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좀 더 많은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을 한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