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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속의 백골

namsarang 2010. 8. 23. 21:40

[특파원칼럼]

비닐 속의 백골

신정록 도쿄 특파원
지난 19일 도쿄 인근 사이타마시에 있는 한 화장터에서 76세의 한 남성 노인이 재로 변했다. 지켜본 사람은 아들과 친척 2명 등 3명뿐. 허리가 아파 돈을 벌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고향인 홋카이도에 있는 집안 묘지에 매장하고 싶어하지만 돈이 없어 언제 가능할지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노인이 죽은 것은 지난 15일 오후, 5만5000엔짜리 월셋집에서였다. 사망 당시 창자 내 온도는 39도. 전형적인 열사병이었다. 이날 기온은 오전 9시에 이미 31도를 넘어섰고, 오후 2시에는 35도까지 올랐다. 집안에 에어컨과 냉장고가 있었지만 쓰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다. 10여년 전 돈이 없어 전기와 가스를 끊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허리가 아파 몇 년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노인 앞으로 한달에 몇 만엔 나오는 연금이 수입의 전부였다. 집세 내고 밥 먹으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기록적인 폭염이 몰아치고 있는 일본에서 지난 6월부터 8월 15일까지 두 달 반 동안 이렇게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노인(65세 이상)이 무려 1만5000명을 넘었다.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고 있으나 이 가운데 100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일 오전 도쿄 오타구(區)의 구청 직원이 104세 할머니의 집을 찾아갔다. '유령 고령자' 문제 때문에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몇 차례 헛방문 끝에 겨우 만난 아들 입에서 충격적인 얘기가 나왔다. 다른 곳에 살던 2001년에 어머니는 이미 사망했으며,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할 때 시체를 큰 가방에 넣어 옮겨왔다고 했다. 구청 직원이 가방을 열자 비닐에 싸인 백골이 나왔다. 아들은 2004년까지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노령연금을 타 먹었다. 2007~09년 3년간은 구청이 지급하는 '장수축하금' 15만엔도 받아 썼다.

지금 일본에선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런 엽기적 사건들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노인 문제에 빈곤 문제가 겹쳐진 충격적 사건들로 사회 전체가 휘청거린다. 가까이 지내는 일본인들은 이 얘기만 나오면 망연해한다. 20일 현재 전국에서 확인된 100세 이상 유령 고령자는 이미 400명을 넘어섰다. 조사 대상을 70세나 80세 이상으로 낮추면 얼마나 충격적인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제도 탓일까.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노인 복지제도는 세계가 알아주는 수준이다. 병든 노인들이 전문시설에 들어가 의료·생활 서비스를 함께 받을 수 있는 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한 게 벌써 10년 전이다. 75세 이상 노인들이 의료비의 10%만 내면 모든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후기(後期)고령자 의료보험제도'도 2008년 도입했다. 2009년에 GDP 성장률은 ―5.2%였는데도 의료비는 3.5% 늘어나 국가 재정을 압박하고 있는 것도 이런 노인복지제도들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도입된 복지제도는 되돌리기 어렵다.

이 현상들을 고령화 사회의 그늘 정도로 치부하면 그만일까. 그렇게 가볍게 보고 넘어가기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 그래서 일본 정부와 언론은 물론 재계와 시민단체들까지 이 문제에 달려들고 있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아낼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일본보다 출산율은 낮고 고령화 진행 속도는 더 빠른 한국의 10년 후가 이런 모습일지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