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4주일-주님께 다시 돌아서는 회개

namsarang 2010. 9. 12. 14:46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24주일-주님께 다시 돌아서는 회개


                                                                                                                                                            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의 핵심인 회개와 기쁨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회개는 죄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분명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카 15,8).

 되찾은 양의 비유나 은전의 비유가 갖는 공통점은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찾고 나서는 형제들을 불러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 자비는 미워하고 증오하는 형제들이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27-31).

 형제들 관계의 핵심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어느 누구도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비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는 삶의 태도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의 행복입니다(루카 14,15).
 
 사실 되찾은 양은 유다인들을, 되찾은 은전은 이방인들을 암시하면서, 두 비유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 두 비유를 종합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곧 유다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믿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암시하면서, 자비로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각자의 선택을 물어보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유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가 돌아온 동생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 아버지에게 화가 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아버지는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되찾은 아들 비유에서 큰아들이 아버지 말씀을 이해하고 따랐는지, 아니면 따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듯 결론 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깨는 말들은 바로 이 비유를 묵상하는 신앙인들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큰아들이 한 말을 보면, 큰아들은 동생을 이미 자신의 삶과 마음 속에서 지운 듯이 보입니다. 동생이 살았거나 돌아왔거나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탕진해 버린 재산에 관심이 더 있는 듯합니다.

 사실 큰아들도 동생과 함께 이미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루카 15,12). 그러나 '좀 더' 갖고 싶은 욕망이 그를 지배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것도 모두 자기 것이 될테지만, 이제 아버지가 남은 재산마저 동생을 위해 쓸 것을 생각하면 아까운 생각이 드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큰아들은 행복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으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큰아들은 죄와 죄가 낳은 결과를 구분하지 못해 방탕한 생활에 빠졌던 동생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죄가 가져온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결과를 작은아들과 함께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사랑과 자비의 연대성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1티모,13.16).

 주님께 다시 돌아서는 회개는 고통과 수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수치를 사랑과 자비로 변화시키는 은총의 역동성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