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2주일-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가치

namsarang 2010. 8. 29. 11:19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22주일-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가치


                                                                                                                                                          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주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들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가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 다음(루카 14,2-6),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깊이 새겨야할 두 가지 내용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는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을 향해, 윗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권고하시고(루카 14,10), 다른 하나는 식사에 초대한 주인을 향해,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13).

 사실 수종은 붓고 부풀어 오르는 병입니다. 주님은 삶에서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 교만한 마음을 수종을 앓는 사람에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로 선택한 신앙인들의 삶도 자신만을 위하는 교만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 있을 적이 많습니다. 세상이 갈망하고 열광하는 힘을 얻으려고 우리 모두는 내적으로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교만이라는 수종을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만은 주님의 뜻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이런 삶에는 거짓이 진실인양 부풀어 올라 진실을 가리고 있습니다. 비움, 가난, 겸손, 종이라는 신앙의 덕목들이 주는 아름다움이 가려있고, 오히려 권력, 부, 교만, 자기중심적 삶이라는 세상의 가치들만이 중히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니 늘 윗자리에 앉고 싶어 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로 만나고 식사에 초대하는 경우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삶을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주인공 의식이라는 증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만연한 주인공 의식이란 자신의 자아만을 내세워 모든 것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용어는 연극과 관련이 있습니다. 연극에는 주인공과 조연이 있습니다. 조연은 연극을 이끌면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의식이란 자신의 삶에서 조연은 없고 자신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증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은 각자 삶의 현장에서 조연의 역할만을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고 바라보면,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인 자신도 사실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조연일 뿐입니다. 공동체 삶에서 자신은 주연일수도 조연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당연한 진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만이 옳고, 오직 자신만이 그 일을 맡아 할 수 있고, 오직 자신만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교만으로 살아가곤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자신만을 위해 움켜진 부와 허영과 교만을 통해, 늘 '좀 더'라는 탐욕을 마음에 불러일으키고 그것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몰입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자신만을 위해 움켜진 부와 허영과 교만을 멸망에 이르는 3가지 단계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좀 더' 움켜줘야지, '좀 더' 윗자리에 앉아야지, '좀 더' 높아져야지 하는 탐욕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을 주님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가 주는 이런 가치들은 결국 지나가고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요한 2,16-17).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거기에는 영원함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가치를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책임과 봉사는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양심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는 신앙의 가장 고귀한 실천적 행위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루카 4,18), 심지어 당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40).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여정을 선택하신 주님의 삶은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신 주님 사랑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주님 사랑은 무엇인가를 늘 필요로 하는 가난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과는 구별되는 신앙인의 가치 기준과 행동 양식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시편 6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