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미래 가꾸는 한국교육의 힘
12월의 동티모르는 우기(雨期)로 접어들었다. 싱가포르를 경유해 수도 딜리에 도착한 첫날 오후 세찬 비가 쏟아졌다. 하수시설이 없어 해변도로는 순식간에 흙탕물이 흐르는 개울로 변했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바지를 걷고 보트처럼 차를 밀고 갔다.
16세기부터 1975년까지 400여 년 동안 동티모르를 지배한 포르투갈은 이 나라에 가난과 혼혈, 가톨릭을 남겨놓았다. 주민의 91.4%가 가톨릭 신자다. 1989년 동티모르를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 바닷가 언덕 성당 옆에 서 있었다. 한국에도 두 차례 왔던 교황이라 반가웠다. 교황의 방문은 동티모르인들의 독립의지를 세계로 전파하는 계기가 됐다.
동티모르는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 100만 인구의 절반이 성인 기준 하루 0.88달러(세계은행 통계) 미만으로 생존한다. 산간지역으로 갈수록 영양실조가 심각해 주민의 키가 작고 팔다리가 가늘다. 딜리 시내에도 말라리아와 뎅기열을 옮기는 모기가 설친다. 석회가 섞여 있는 물을 잘못 마셨다간 설사병에 걸린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추진하는 해수담수화 플랜트가 완공되면 딜리의 물 부족이 다소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맨발의 꿈’ 산간마을에서 상영
1999년 친(親)인도네시아 민병대가 저지른 만행의 상흔이 11년이 흐른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헤라공대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를 통틀어 세 번째로 좋은 공과대학이었다. 지금은 지붕과 내부가 불타고 벽만 남은 건물들이 잡초가 무성한 교정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외환위기로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면서 들어선 하비비 정부는 유엔의 압력으로 동티모르의 독립을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수용했다. 민병대는 독립파가 투표에서 이기면 피로 강을 이룰 것이라고 공공연히 협박했다. 1999년 8월 30일 유엔 주도로 치른 주민투표에서 투표자의 78.5%가 독립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오자 민병대는 닥치는 대로 살상 방화 약탈을 자행해 동티모르 주택 건물 학교의 70%를 파괴했다.
딜리를 벗어나면 그때 불탔던 학교 건물이 대부분 방치돼 있다. 새로 지은 교실도 양철지붕에 천장이 없어 태양열이 그대로 교실로 쏟아져 들어온다. 창문은 아예 없고 낡은 칠판이 교실임을 알려준다. 풀이 자란 운동장에서는 돼지 가족이 산보를 했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돼지를 방목한다.
서경석 동티모르 대사는 “한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전환한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된 것은 교육의 힘”이라며 “한국의 원조는 교육 지원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 대사는 산간의 작은 마을을 방문해 테툼어(語) 자막이 깔린 영화 ‘맨발의 꿈’을 상영해준다. 동티모르의 히딩크라는 말을 듣는 김신환 감독이 키운 유소년 축구단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다. 서 대사는 염소 축사(畜舍) 같은 학교 교실환경을 개선하는 일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동티모르의 비정부기구(NGO) 알롤라 재단이 2011년 청암 봉사상을 받는다. 청암은 포스코 설립자 박태준 명예회장의 아호. 알롤라 재단의 회장 크리스티 구스망 여사는 호주 출신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독립 투쟁을 벌이다 20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남편 샤나나 구스망을 만났다. 그는 초대 대통령을 지내고 지금은 총리다.
동티모르에는 일부다처(一夫多妻)에 매매혼 풍습이 남아 있다. 신랑이 처가에 700달러 정도를 주고 아내를 데려온다. 아내를 돈 주고 산 소유물이라고 인식하는 남편들의 가정폭력과 아내 학대가 심각하다. 알롤라 재단은 여성 교육, 가정폭력 방지, 모성 보호 같은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이 나라의 출산율은 7.8명이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다. 여성들이 출산 때 산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출산한 뒤에는 모유 수유를 기피하는 풍습 때문이다. 알롤라 재단은 지역 건강센터를 중심으로 산모의 건강관리와 출산을 지원하고 모유 수유 장려운동을 펼치고 있다.
알롤라 재단, 청암봉사상 받는다
동티모르에선 2011년부터 전국 고등학교(77개) 1학년부터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과목으로 가르친다. 교사의 봉급은 120달러 정도. 동티모르의 청년들은 숙식을 제공받고 한 달에 1000달러를 벌 수 있는 한국에 근로자로 가는 것이 최고의 꿈이다.
일요일 아침 해변을 산책하다 태권도 도복을 입고 한국어 구호를 외치며 맨발로 달리는 200여 명의 남녀 청소년과 만났다. 한국에서 보내준 중고 도복인 듯 ‘부산체육관’ ‘장흥태권도장’ 같은 글씨와 태극마크가 부착돼 있었다. 1999년 유엔 평화유지군 상록수부대를 통해 첫 인연을 맺은 한국은 동티모르 청소년들에게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도 못 해준 ‘맨발의 꿈’을 심어주고 있었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창(窓) > 이런일 저런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능희와 송일준이 아니고? (0) | 2010.12.22 |
---|---|
정부 긴박했던 하루 (0) | 2010.12.21 |
대북 傳單날리는 의원들 (0) | 2010.12.19 |
뿌리 깊은 나무처럼 (0) | 2010.12.18 |
새 문화부 장관의 조건 (0) | 2010.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