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그림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놔라

namsarang 2011. 1. 22. 10:28

[DBR/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놔라

 

미완성작 남발 다빈치 내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 그림에 쓰이는 재료를 본인이 부담한다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주문을 받았으며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이후 다빈치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기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창의력은 뛰어났지만 실행력이 부족한 다빈치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 DBR 자료 사진
15∼17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었다. 당시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인문학자나 예술가치고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다.

다빈치는 생애 첫 30여 년을 피렌체에서 성장해 예술가로 활동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에서는 무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다. 메디치 가문은 왜 다빈치를 등용하지 않았을까? DBR 73호(2011년 1월 15일자)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선택이 현대의 기업인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소개했다.

다빈치는 미술은 기본이고 건축, 미학, 음악, 요리, 수리학(), 생물학, 해부학, 지질학, 수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 연구했다. 그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미술 수련을 받았는데, 당시 베로키오의 제자들은 대부분 성공 가도를 달렸다. 1470년 즈음 도제 생활을 거의 마친 다빈치는 스승 베로키오와 함께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렸다. 이때 다빈치는 베로키오가 10대에 불과한 제자의 그림 솜씨를 보고 자신의 붓을 꺾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다빈치는 정확히 20세가 되던 해(1472년)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마치고 화가로 독립했다. 그런데 그는 작품 주문을 받지 못했다. 메디치 가문을 비롯해 특별한 후원을 받지도 못했다.

1481년 또 한 번의 굴욕이 이어졌다. 당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중요한 작품 의뢰가 들어왔다. 교황이 피렌체와 화친을 맺겠다는 뜻에서 자신이 건축한 예배당의 장식을 로렌초에게 의뢰했다.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를 선발해 로마로 파견했다. 당연히 다빈치도 여기에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보티첼리, 시뇨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가 갔다. 로렌초가 지명한 예술가들은 모두 베로키오 공방 출신이었고 여기에서 다빈치만 빠졌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수도원의 제단화로 사용될 ‘동방박사의 경배’를 주문받았다. 이 그림에는 당시 궁핍했던 다빈치의 슬픈 현실이 녹아 있다. 다빈치는 작품에 쓰이는 물감과 기타 비용을 모두 본인이 부담하는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그리고 나뭇단 한 짐과 밀 13L, 포도주 한 통을 사례로 받았다. 수모에 가까운 대우였다. 이 작품은 1482년 다빈치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떠나면서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이후 다빈치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기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기발한 생각으로 새롭게 작품을 시작했지만 이를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 밀라노에서 제작하다 중단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의 기마상’과 ‘안기아리 전투’, ‘성 안나와 성 모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대부분이 미완성으로 남았다.

다빈치의 치명적 약점에 대해 조르조 바사리는 통렬하게 지적했다.



1470년부터 1472년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승 베로키오와 함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 다빈치는 왼쪽 하단의 천사를 그렸는데,

베로키오는 제자의 솜씨에 충격을 받고 작품 제작을 중단했다.

다빈치는 1475년경 배경 부분을 완성했다.

 

“다빈치는 분명히 예술에 대한 이해가 탁월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끝내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완벽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상은 고매했다. 그의 손이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다빈치는 1482년 밀라노의 로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후원을 받기 위해 피렌체를 떠났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다빈치는 고매한 이상을 가졌지만 이를 실현할 수 없는 초라한 이상주의자였다.

  다빈치가 창의적인 인재임은 분명하다. 세밀한 관찰력과 극단적인 상상력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끝까지 완수해내는 추진력이 없었다.

오늘날 경영 리더들에게 다빈치는 경계의 대상이다. 계획은 잘 세우지만 이를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추진력이 부족하다면 경영 현장에서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직원이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가. 그러나 그 프레젠테이션이 실행으로 잘 연결되는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면한 일의 성과를 내는 게 아니라 그 성과를 내기 위한 준비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가. 추진해낼 능력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업무에 대한 결함만 지적하는 것으로 월급을 챙겨가는 후안무치한 직원은 얼마나 많은가.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야 한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 경영 현장에서는 회의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 구슬땀을 흘릴 수 있는 실행자가 필요하다. 성과 우선주의도 문제지만 성과 없는 주도면밀함도 미덕은 아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런 이유로 다빈치를 내쳤다. 다빈치는 실행력에서 2% 부족했다. 때로는 2%가 만사를 그르친다.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던가.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정리=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