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
국력이 되찾아온 외규장각 의궤
1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외교통상부 장관 공관에서 조촐하지만 의미가 큰 만찬행사가 열렸다. 김성환 장관의 초청으로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위해 활동해 온 ‘외규장각 포럼’ 위원들이 모였다. 학계와 문화계 전문가, 언론인, 공무원들이 어울려 사흘 뒤로 다가온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20년 만에 숙원이 이뤄졌다”는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의 말을 시작으로 남의 나라에 빼앗겼던 문화재를 되찾는 감격을 나눴다.
‘한국 때리기’가 ‘한국 상품 열풍’으로
외규장각 의궤 귀환에는 여러 개의 숫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가 프랑스군에 의궤를 약탈당한 1866년 병인양요를 기점으로 계산하면 145년이 지났다.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창고에서 의궤를 발견한 때부터 따지면 33년 만이다. 이태진 위원장이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시절인 1991년 정부에 반환 요청을 건의한 것을 출발로 잡으면 20년이 걸렸다.
병인양요 시절 선조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박병선 박사와 반환 운동의 씨를 본격적으로 뿌린 이태진 위원장을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반환 과정에 참여했던 후손들은 의궤 약탈 사건의 해피엔딩을 지켜보고 있다. 기쁜 일이지만 반드시 곱씹어볼 점이 있다. 왜 우리 조상들은 145년 전에 의궤를 빼앗겼고, 후손들은 보물의 소재를 알면서도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오지 못했을까.
만찬 참석자들은 ‘국력(國力)’에서 해답을 찾았다. 병인양요 때는 우리가 힘이 없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강화도까지 쳐들어온 프랑스군에 소중한 기록유산(외규장각 의궤)을 빼앗겼다. 조상 탓만 할 수도 없다. 프랑스가 1993년 고속열차(TGV) 수출을 성사시키기 위해 의궤 반환 카드를 내놓았지만 우리는 끝까지 프랑스를 밀어붙이지 못했다.
1996년 대우전자의 프랑스 전자회사 톰슨멀티미디어(TMM) 인수 무산은 프랑스와 한국의 위상 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부실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나선 프랑스 정부는 TMM을 매각하기로 하고 대우전자를 인수 업체로 선정했다. 공식 발표가 나오자마자 프랑스 국민과 언론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은 “이류 기업이 선진국 프랑스의 세계적 기업을 인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한국을 싸구려 상품과 부도덕한 졸부의 나라로 매도했다. 프랑스의 ‘한국 때리기’는 두 달 넘게 계속됐다. 결국 대우의 TMM 인수는 무산되고 한국과 프랑스 관계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10여 년이 흐른 요즘 프랑스에서 한국 기업 제품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삼성전자는 프랑스 휴대전화 시장에서 6년 연속 1위, TV와 냉장고는 5년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브랜드 선호도 조사에서 지난해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LG전자도 세탁기는 1위, 냉장고와 TV는 2위에 올랐다. 프랑스 소비자들에게 한국 전자제품은 어느덧 명품이 됐다.
한국의 국력 또한 국제무대에서 프랑스에 무시당하지 않을 수준으로 높아졌다. 한국은 프랑스보다 먼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의장국 자리를 인계했다. 한국의 국력이 커지지 않았다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자국 내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의궤 반환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기자는 誤報의 짐도 벗었다
필자는 파리 특파원 시절인 1993년 외규장각 의궤와 인연을 맺었다. 그해 말 우리 대사관의 발표를 토대로 ‘상호교류 및 대여 방식’으로 외규장각 의궤가 곧 귀국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했다. 이 기사는 결국 오보(誤報)가 됐다. 지난 18년간 프랑스에 반환을 촉구하는 칼럼을 몇 차례 쓰기는 했지만 외규장각 귀환 불발은 줄곧 마음의 빚이었다. 필자도 이제 홀가분해졌다. 의궤를 되찾아온 원동력이 국력이어서 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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