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맞은 5·16 <下>… 영원한 2인자]
우린, 가진 것 다 불살랐다 朴대통령이 변하기도 했지만 '좋은 나라' 일념은 계속됐어
아지트 - 청계천에 '상수'라는 술집이 거꾸로 읽으면 수상이야 후르시초프 6시라고 하면 상수에서 6시 만나잔 소리야
장면 총리 체포조 - 박종규가 특수부대 이끌고 반도호텔로 잡으러 갔는데 수도원으로 도망갔더군
근대화 자부심 - 민족중흥·조국 근대화 그런 말 자체가 없을 때 우리가 처음으로 사용했지 그걸로 근대화 기조 닦았어
영원한 2인자 - 찬스 여러 번 있었지만 난 별로 할 생각 없었어 악역 맡겠다는 생각뿐…
5·16의 주역이었던 김종필(85) 전 총리는 지난 8일·12일 두 차례 인터뷰를 마치면서 "나 스스로 5·16을 평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것을 다 불살랐다. 그것으로 조국 근대화의 기조를 닦았다"고 했다.
―5·16 직전 청파동 집은 안전했나요?
"전날 헌병대가 불시에 찾아왔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계획 서류를 압수하려고. 나는 밖에서 혁명동지들을 만나고 있어서 몰랐어요. 우리 집사람이 서류를 천장에다 감추려 했는데, 사다리가 없으니까 뭘 놓고 올라갔다 떨어지고 올라갔다 떨어지고…. 밖에서는 헌병들이 막 문을 두드리고 있고요. 겨우 올려놓고 문 열어줬지."
―헌병들이 못 찾아냈군요?
"형식적으로 찾는 척 했대요. 그때 분위기가 그랬어요. '(군사혁명 하는데) 방해되는 일은 하지 말자'고 무언중에 그랬어요."
―김종필 중령이 만든 혁명공약을 박정희 소장은 손 안 댔습니까?
"초안 그대로 글자 하나 고치지 않았어요. 나중에 하나 추가됐는데, 제6항입니다.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내용 말입니다. 난 내키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이 버마식 군부 통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요. 군부가 물러났다가 민간정부가 시원치 않으면 다시 나오는 게 버마식이거든."
-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5·16 당일과 이튿날 포고령 14호까지 쏟아냈는데 요점이 뭡니까?
"혁명을 기정사실화하자는 거예요. 가령 포고령 4호는 정권 인수, 국회 해산, 정당사회단체 정치활동 금지 같은 걸 담고 있는데, 혁명위원회가 의결한 것도 아니야. 내가 포고령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하나씩 발표한 것이지. 정권이 혁명 세력에게 다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만들려는 것이었지."
―5·16 당일 박정희 소장을 처음 만난 곳이 어딥니까?
"통금 해제시간인 새벽 5시 혁명공약 인쇄를 마치고 나자 박 소장이 왔어요. 굉장히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장도영이가 헌병 시켜서 나를 쐈어, 나를 쐈어' 하는 거예요. 나도 이미 인도교에서 헌병 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장도영 계엄사령관을 미국으로 쫓아냈는데, 그 후로 만난 적 있습니까?
"단 한 번도 없어. 박 대통령도 미국 갔을 때 못 만났다고 해. 어딘가 살아 있겠지. 죽었단 얘기 못 들었으니까."
―장면 총리 체포조는 누구였습니까?
"박종규 소령이 지휘하는 GDT(특수부대)팀이 총리 체포조가 됐는데, 그들이 선두에 오니까 헌병들이 풍비박산된 거죠. 장면은 반도호텔에서 수도원으로 도망가고 없고, 체포조는 호텔 앞에서 공중에 들이대고 공포를 쐈어요. 나는 광명인쇄소에서 그 소릴 듣고 교전이 벌어진 줄 알았어요."
―그날 육군본부 회의 상황이 험악했죠?
"우리들이 들어가 시위를 했어요.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짓고, '동조 안 하면 재미없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나섰는데 당신들은 적당한 소리나 하고 있다' 그랬더니 '찬성, 찬성, 찬성' 이래요."
―한 사람씩 호명했습니까?
"여럿이 앉아 있는데 의견을 얘기하도록 했지요. 6군단장, 육사교장, 그리고 육군본부 일반참모, 특별참모들…. 우리는 금방 일이라도 낼 것 같은 표정으로 있었지요."
―5·16 사흘 후 미8군에 가서 사령관을 만났지요?
"5월 18일 8군 사령관의 정보장교인 몰 대위가 찾아왔어요. 다음 날 오전 10시 카터 매그루더 사령관이 날 만나자 한다 그래요. 그런데 군복 벗고 평복으로 와달라는 겁니다. 육군 대장이 육군 중령을 만나서 얘기하면 계급이 영향을 줄 것 같다고요. 내가 '배려 고맙다' 하고 이튿날 갔어요. 매그루더 장군이 체구가 큰데 암체어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래요. '내 지휘하에 있는 부대를 맘대로 끌고 가서 뭐를 했다고? 혁명을 해? 마이어협정 위반이다'고 소리를 질러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큰 사람이 소리 지르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울 안에 큰 곰이 돌아다니는 것 같더군요. '그런 소리 하려고 오라 했냐. 말 다 했냐. 돌아가겠다' 하고 일어서는데, 가이 멜로이 부사령관이 '얘기가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디 가느냐'고 앉혀요. 근데 매그루더가 또 '전방부대 즉각 원대 복귀시켜라'고 해요. 내가 그랬어요. '매그루더 장군 좀 지나칩니다. 당신 휘하 부대를 빼내면서 무슨 부대가 몇 날 몇 시에 혁명한다고 신고하고 하는 그런 혁명이 어디 있느냐.' 매그루더가 날 한참 쳐다보더니 웃어요. '어, 그 말은 맞다' 하면서요."
―상황이 역전됐군요.
"당신이 혁명을 인정 안 하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또 웃어요. 매그루더가 '혁명 인정하고 휘하 부대 복귀하는 문제는 내일 계속 협의하고 오늘은 이걸로 끝내자' 그래요. 다음날 두 번째 만나서 혁명 인정, 전방부대 복귀, 주요 인사 협의, 부대위치 이동 때 유엔사 동의, 미국의 대한(對韓) 지원 등 5개항에 합의했어요. 돌아올 때 박정희 소장에게 보고했더니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수고했어' 하더군요. 23일 박 소장도 매그루더를 만났고, 25일 서울·워싱턴에서 공동성명이 나온 겁니다."
―언제쯤 '5·16이 성공했구나' 느꼈습니까?
"5월 18일 사관생도들이 혁명 지지 행진을 했을 때, 그리고 5월 23일 박·매그루더 합의가 이뤄진 때였습니다."
―거사 전에 세력을 규합할 땐 어디서 만났습니까?
"서울 청계천에 있는 술집인데 이름이 '상수'였어요. 우리 아지트 겸 연락처였지. '상수'를 거꾸로 읽으면 '수상'이 되는데, 우리들은 당시 신발 벗어 유엔 단상을 때리던 '후르시초프 소련 수상'을 거기에 빗댔지. '후르시초프 6시' 하고 말하면 상수에서 6시에 만나잔 소리야."
―모이면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내가 '혁명한다. 가담할래?' 하니까 다들 '다시 말해봐 임마' 그래요. '혁명한다. 장면 정부는 안 된다. 같이 할래? 못하겠다면 비밀만 지켜달라' 했지. 그러니까 내 손을 꼭 잡고 '야, 나를 빼면 되니' 하는 거야. 그때 장교들의 열정이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어. 더 들을 필요도 없어."
―김종필 중령은 조직력과 재산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는 의미에서 '나는 혁명의 아버지였다'고 훗날 자부했다던데, 지금도 '5·16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어리석은 소리 한 적 없어요."
- ▲ 5·16 후 얼마 안 있어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은 관사로 새뮤얼 버거 미국대사 부부 등 주요국 대사 부부를 초청했다. 사진은 김 부장이 부인들 앞에서 만돌린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한복 입은 이는 김 부장의 부인 박영옥 여사.
―혁명 후에 중앙정보부장은 왜 맡았습니까?
"혁명을 뒷받침하는 임무를 수행할 놈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반드시 보복당할 가능성이 큰데, 내가 당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실제 5·16 후 공격을 당했죠?
"최고의원 중에 상당수가 군대 이외에는 발붙일 데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도대체 비례대표가 뭔지도 묻지 않고, '그런 것을 우리가 왜 하냐. 김종필 너 혼자 다 하냐'고 집단이 돼 가지고 날 공격하는 거야. 참 안타까웁디다. 그냥 덤비는데 내가 할 말이 없었어.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국회의원 됐어."
―지금은 청구동에 살고, 5·16 때는 청파동에 사셨죠? '청'자 붙은 동네를 좋아하셨습니까?
"사람들이 나더러 청구동을 청와대 만들려고 한다고 그랬어요."
―찬스가 여러 번 있었잖습니까?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뒷받침하는 일을 해야겠다, 악역을 내가 맡겠다,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런 생각이 있었나요?
"박 대통령은 생각이 한 서너 번 바뀌었어요. 그러나 남에게 부담되지 않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은 계속됐어요. 지금 아랍 나라들을 보세요. 30~40년 (장기집권) 하니까 절딴 나고 있잖아요. 모두들 한계를 알아야 하는데 욕심이 앞을 가리니까 그런 결심을 못 하나 봐요."
―5·16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5·16 이후 18년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혁명'을 성취한 과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50년을 맞아 본인은 어떤 평가를 하시겠습니까?
"5·16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다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불사르고자 했다는 점은 말하겠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엔 근대화라는 말 자체도 없었어요. 우리가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라는 말을 처음 쓴 것입니다. 5·16은 조국 근대화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근대화의 기조(基調)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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