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123

5·16 전후

namsarang 2011. 5. 16. 19:30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 5·16 50년]

5·16 전후

 

 

“방첩대가 거사계획 파악했지만, 장총리는 장도영만 믿어”

《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정계에 투신한 뒤 야당 정치인으로 7선 의원을 지낸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89)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증언하는 회고록을 낸다. 19일 두 권으로 출간될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에는 광복 이후 좌우대립 상황부터 건국, 자유당 독재, 4·19혁명, 5·16군사정변, 유신체제, 3김(金)정치 등 현대 정치사의 주요 장면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회고록 출판기념회는 23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회고록의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
회고록 출판기념회는 23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립니다.

5·16 때 6관구 방첩대장(현 기무부대장)이었던 이청일 소령(5·16 이후 강제예편 뒤 도미)이 1994년 12월 나를 찾아와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이 소령에 따르면 쿠데타 세력이 거사일을 1961년 4월 29일∼5월 26일로 잡았다는 첩보가 당시 방첩부대장(현 기무사령관)인 이철희 장군에게 보고됐다. 이에 현석호 국방장관이 미8군에 문의하자 미군 측이 ‘절대 신경쓰지 마라’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 이 대답은 미8군 자체의 정보와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에게서 나온 말이었다고 한다. 이 장군은 “1군사령부의 병력이 있고, 31사단이 부평, 30사단이 수색에 있어서 절대로 쿠데타는 일어날 수 없다”고 장담했다. 이 말을 미8군으로부터 전해들은 현 장관이 경계심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이 소령의 증언과 내가 입수한 정보로 볼 때 쿠데타 계획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정보도 여러 채널을 통해 장관, 총리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권 핵심부의 안일한 낙관론과 잘못된 판단,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처신이 어우러져 쿠데타가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장면 국무총리가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장 총리를 사흘 동안 매일 찾아가 “장도영은 기회주의자이므로 지금 같은 과도기에 기용해서는 안 되고 청렴하고 강직한 최경록 중장이 적격”이라고 건의하자 장 총리는 크게 역정을 냈다. 평안도 출신으로 같은 장 씨였기 때문이었는지 장 총리는 끝내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당시 장 중장은 ‘자유당 때 부패한 정치군인이었다’는 투서를 받고 국회 국방분과위원회에서 비밀리에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일종의 피의자로서 조사받고 있는 사람을 참모총장에 임명하면서 나에게 동의를 요청하자 나는 강력히 반대해 국방위에서 닷새 동안이나 토의를 벌였다.

그 무렵 이청일 소령의 주선으로 김종필(JP), 석정선, 길재호 중령과 무교동의 ‘향진’이라는 식당에서 같이 만난 것이 5·16 주도세력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JP가 나에게 국방장관을 맡아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뒤에 이청일은 “쿠데타 성공 후엔 JP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이철승 의원을 제거하려 했다”고 알려줬다. 놀라운 일이었다. 난국수습의 최적임자가 나라고 했던 바로 그 JP가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쿠데타로 9개월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군을 전혀 모르고 군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치인에게 혼란기의 국방장관을 맡기는 등 군과 관련된 인사 실패였다.

나는 일찍부터 안보와 군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3대 국회에 진출한 이후 줄곧 국방위원으로 일해 왔다. 다른 의원들은 재선을 염두에 두고 자기 지역구에 도움을 주기에 유리한 위원회를 택했고 의원 중에는 군대 경험을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국회로서는 믿기 어려운 아이러니였다. 문민 우월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군대가 갖고 있는 불만을 몰랐고,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고,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나는 장 총리에게 군의 숙정과 재편을 누차 건의했지만 수용되지 않고 계속 미뤄졌다. 그 사이 잠복해 있던 군대 내부의 동요는 커지고 있었고 공공연하게 쿠데타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장 총리는 “나는 장도영 중장을 믿는다”고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 총리는 별안간 내게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나가달라고 해 5·16쿠데타 두 달 전에 도미했다. 결국 귀국길 일본에서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이청일 소령에 따르면 쿠데타 세력이 국회 국방위원장인 내가 미국에서 17일에 돌아오기 하루 앞서 16일로 거사일을 잡았다는 것이다.

▼ JP와의 악연 ▼

 

5·16 전 JP가 하극상 사건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는 그를 구해준 적이 있다. 4·19 이후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최영희 장군 등 선배 장성들이 부정부패하다며 몰아내려던 사건이었다. 나는 JP 등을 구제해 주고 단 1명만 처벌하도록 조치해 줬다.

일본에 있다가 5·16을 맞은 지 얼마 안 돼 주일 한국대표부에서 나의 외교관여권을 돌려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여권은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서류이다. 누가 감히 마음대로 내게서 국적을 빼앗는단 말인가”라며 호통을 치며 거절했다. 그러나 얼마 후 JP가 지휘하는 중앙정보부가 일본 정부에 내 여권을 무효화했다고 통보해 나는 ‘무국적 불법 체류자’가 됐다.

그 후 귀국을 포기하고 다시 미국에 가 있을 때 JP가 ‘자의반 타의반 외유’라는 명목으로 미국에 왔다. 그가 워싱턴에서 교포들과 간담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부랴부랴 2시간여 동안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한일회담 당시 일본 외상과 회담하면서 ‘그 말썽 많은 독도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버리면 양편에 말썽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서슴지 않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기지(機智) 있는 외교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우리 강토를 제 집 텃밭처럼 마음대로 없애버리자고 말하다니 격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우리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평화선을 저렴한 대가로 양보하면서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계획도 대안도 없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연설이 끝나고 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는 나를 알아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군사정부는 자기 스스로 국민 앞에 공약했던 것을 전적으로 뒤집고, 이에 대해 비판하는 국민에게 보복을 능사로 알고 있으니 어찌된 셈이오. 이것이 5·16 정신이오”라고 따졌다. 그는 보복정치를 그만두라는 내 말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어색하게 “글쎄요. 우리는 혁명정신대로 잘 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내가 본 박정희 ▼


1977년 여야 영수회담 197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이철승 신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만나 주한미군 철군 문제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령(포병사령관)이던 때 동기(육사 2기생)인 한웅진 대령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내가 국방위원을 오래 지내 5·16 그룹의 멤버들 대부분도 내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쿠데타에 협조하지 않는 바람에 해외를 떠돌며 10년 동안 정치 방학을 했고 이를 계기로 서로 멀어졌다.

그러다가 정계복귀 후인 1970년 12월 31일 호남고속도로 준공·개통식 날 부산 해운대 한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 밤 만찬에서 박 대통령은 나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해 그와의 악연은 이런 식으로 대충 덮어졌다.

내가 비록 그로부터 많은 정치 탄압을 받았지만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객관적으로 그에 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군인, 남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부단히 공부하며 현상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지니고 있는 군인이었다. 비록 독재를 하고 많은 사람을 탄압한 잘못이 있지만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인간미는 특이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신민당 대표 시절이던 1977년 5월 27일 여야 영수회담에서 나는 유신헌법 개정 얘기를 꺼냈다. 나는 “유신헌법은 근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사안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며 거구의 최규하 총리와 왜소한 김용환 재무장관의 체구를 비유로 들었다. “나라가 최 총리와 같은 몸집이 됐는데 김 장관의 옷을 입을 수 있겠느냐”며 “옷을 바꿔 입을 때가 됐다.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은 통일·안보·외교권을 행사하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훗날 당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들은 얘기로는 박 대통령은 그 후 박준규 씨 등 여당의 주요 간부들과의 술자리에서 내가 얘기한 개헌문제를 꺼냈다. 김 장관은 “대통령은 개헌의지가 있었으나 참모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개헌이 결국 무산됐다. 아쉽기 짝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만일 그때 박 대통령이 개헌을 단행했더라면 이후의 대한민국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