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123

‘40대 3각 라이벌’ YS-DJ

namsarang 2011. 5. 16. 20:00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 5·16 50년]

‘40대 3각 라이벌’ YS-DJ

 

“1970년 대선후보-당총재직 거래 각서, DJ가 먼저 제안”

 

 

김대중-이철승의 각서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이철승 후보가 교환한 각서. 김 후보는 자기 명함에 “십일월 정기 전당대회에서 당권은 이철승 동지 중심으로 편성한다. 후보 당수(이철승)는 분리한다”고 썼다. 별도의 종이엔 “금차 신민당 대통령후보에는 김대중 의원을 추천하고(지지하고) 금년 십일월 정기 전당대회에서는 이철승씨를 당수로 지지하기로 서로 합의 각서를 교환함”이라고 쓰고 그 아래 김 후보 측의 ‘김대중, 조영규’, 이 후보 측의 ‘조연하, 한영수’가 서명했다. 이철승

 

김대중(DJ)은 지난해 나온 자신의 자서전에서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 재투표가 있기 전에 이철승계의 김준섭 씨가 내게 다가오더니 ‘다음 총재 선출할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주면 2차 투표에서 나를 찍겠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명함에 각서를 써 줬다. 승리가 우선이었고, 당시 이철승 씨가 총재를 하기에 부적격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철승 씨는 총재에 나온 일이 없어 나는 그에게 약속을 지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썼다.

그러나 DJ의 주장은 두 군데에서 분명히 잘못됐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준섭 전 의원은 이철승계 표가 필요했던 DJ가 먼저 제안해 각서를 써줬다고 ‘월간 헌정’ 2002년 12월호에서 밝혔다. 또 나는 1976년 9월과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총재 경선에 출마했다. 1976년에는 김영삼(YS)을 누르고 당선됐지만 1979년 전당대회에서는 당시 연금 상태에 있던 DJ가 YS를 적극 지지하는 바람에 재선에 실패했다. 두 번에 걸친 총재 경선에서 DJ는 나를 지지하기는커녕 나의 총재 당선을 방해했다. 훗날 1984년 2·12 총선 이후 동교동으로 DJ를 방문했을 때 DJ는 “사실 나는 이 의원께 감사한 면도 있고 미안한 면도 있다”고 이런 사실을 사과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에서 나는 “대통령께서는 김대중 씨가 무서워서 피하십니까”라며 DJ의 석방을 건의했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은 “그 사람(DJ)은 무책임한 선동선전의 화신 아닙니까”라며 “김대중 씨에 관해 이 당수께서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나는 즉시 “내가 보장하겠습니다. 김대중 씨를 내 주십시오”라고 재차 요구했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경합으로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한 야권은 4개월 후에 치러질 총선에 대비한 통합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두 김 씨의 대권욕이 살아 있는 한 야권 통합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그때도 양김은 자기중심의 통합을 유도하려 했다. 양김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두 달이 조금 못된 2월 10일 민주·평민 야권 단일화추진위를 구성했으나 이틀 뒤에 DJ가 다시 야권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둘 사이의 결별이 시작되었다.

반탁학생대회 개회사 1946년 1월 이철승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고려대 정치학과)이 반탁학생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철승 씨 제공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은 나에게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을 예고했다. 이 선거는 양김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와 지역감정을 이용한 패거리정치의 종합판이었다. 광주에서 불기 시작한 DJ의 평민당 바람이 호남 전역으로 번져 갔다. 평민당의 상징 색깔이 황색이라고 해서 언론은 이것을 ‘황색바람’이라고 했다. 나는 선거에서 지역바람은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그런 주장은 YS의 영남 바람과 DJ의 황색 광풍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YS가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된 뒤 한때 나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나는 YS의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인 김윤도 변호사를 만났다. 김 변호사는 YS에게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소석(이철승의 아호)을 국무총리나 안기부장을 시켜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YS는 며칠 뒤 김 변호사에게 “소석을 시키자는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단다. 참모들과 상의한 결과 나를 다룰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YS는 취임 이래 접촉이 없었는데 (1997년) 한보사건으로 정신이 없을 때 갑자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 YS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한보사건에 내 아들 현철이가 관련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위정자는 불고가사(不顧家事·집안일을 돌보지 아니함)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소.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입장을 취하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오”라고 위로했다. 그 무렵 YS는 아들 문제로 상당히 괴로워했고 그것 때문에 국정수행 의욕을 상당히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 안보외교 나선 야당당수 ▼


유진산 집에 모인 40대 기수들 1970년 전후 ‘40대 기수론’이 정국을 휩쓸 당시 40대 정치인 등이 신민당 유진산 당수의 집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영삼 조영규 고흥문 서범석 김대중 이철승 홍익표 씨. 이철승 씨 제공

 

1977년 초 주한미군 철수가 중대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 제1야당의 대표로서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둘러 미군 철수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미일 두 나라를 순방했다. 당시 박정희의 독재정권이 주는 폐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38선에서 남북이 대치하는 판에 ‘쥐 잡겠다고 독을 깨는’ 결과는 최소한 피해야 했다. 28일 동안 일본과 미국 두 나라를 순방하며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를 비롯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만나 다소 소원해진 듯한 미국과 일본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진력했다.

국가안보를 위한 순방외교를 하고 돌아왔지만 당내에서는 ‘반(反)이철승’ 기류가 거셌다. 귀국 후 국내 기자들과의 회견(4월 6일), 외신기자클럽 회견(4월 11일)을 통해 “중도통합은 자유와 안보가 균형이 되도록 추구하는 개인적인 정치철학이며 이 같은 소신은 굽힐 수 없다”고 다시 밝힌 것이 발단이었다. YS와 이민우 국회부의장 등 비주류계 의원 15명은 시내 모 호텔에 모여 ‘반이(철승) 라인’을 구축하기로 했다. 힘을 모아 나라 안팎의 위기를 극복해야 할 야당은 이렇게 해서 다시 내홍과 갈등의 터널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의 순방외교는 당내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와 박 대통령의 (감사) 친서까지 받으면서 비난을 받았지만 1977년 5월 24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특사일행이 한국 정부와 철군 문제를 협의하는 성과를 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정계은퇴 이후 ▼


수잰 숄티와 함께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이 2008년 10월 북한 인권운동가 수잰 숄티 미국 디펜스포럼 회장에게 제9회 서울평화상 트로피를 전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국내외 주요 인사의 도청 사건이 터지고 열린 (2005년 11월 14일)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2차장(국내담당)의 첫 공판에서 국정원이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나의 전화통화를 도청한 구체적인 경위가 밝혀졌다. 김 씨는 “2001년 초 당시 DJ의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황 씨가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미국도 방문한다고 해서 떠들썩했고 국정원은 대책회의를 여는 등 분주한 때였다”며 불법감청이 이뤄진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김 씨는 “햇볕정책 주창자였던 임동원 씨도 대북 강경 입장을 갖고 있던 황 씨의 행보에 관심이 지대했다”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도청 내용을 보고받았을 개연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김 씨가 법정에서 진술한 대로 나는 황 씨의 방미를 위해 노력했다. 2001년 7월 5일 나는 공개적으로 ‘황 씨의 방미를 즉각 허용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일개 야인으로 건국 전야 좌익과 투쟁하듯 황장엽 씨를 가운데 놓고 DJ와 끈질기게 싸웠다.

2008년 4월 나는 헌정회 회원들과 동해안 고성군 일대 격전지로 시찰을 나갔다. 마침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의 쓰러져가는 목조로 된 별장을 지나치게 됐다. 거기서 3km가량 떨어진 곳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김일성 별장은) 더욱 현대식으로 좋게 치장해 놓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별장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이었다. DJ와 김정일, 그리고 노무현과 김정일이 서로 얼싸안고 있는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남북의 화합이란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발상인 것이다. 나는 김일성 별장을 다녀오자마자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공문을 띄워 김일성 별장을 그렇게 근사하게 재건해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참배하도록 하는 것이 무슨 의도냐고 물었다. 두 달쯤 지난 뒤인 2008년 6월 10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고성군으로부터 그 사진들을 모두 떼어내고 시정 조치했다는 공문을 받았다. 뒤늦게 바로잡기는 했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행정 관료들의 실태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