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멤링(Hans Memling 1433-1494)
1430년경 독일 젤리겐슈타트(Seligenstadt)에서 출생하여 1494년 8월 11일 벨기에 브뤼헤(Brugge)에서 사망했다.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했으며, 브뤼셀에 있는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460년대 중반 플랑드르의 번영한 상업 도시 브뤼헤에 정착해 대형 세 폭 제단화 《최후의 심판》(1467~1471)을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중세시대 조합의 거대한 중심이었던 이곳에서 화가조합에 가입했다.
한스 멤링은 얀 반 에이크의 혁신적인 기법을 따른 플랑드르 화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광학 사실주의에 입각한 정교한 초상화와 종교화로 부유한 중산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화려하고, 개인 예배당이나 가정에 두기 쉽게 비교적 작은 크기의 패널로 만들어져서 유럽 왕실의 고위 관료들이 그의 작품을 앞 다투어 사갔다. 1480년대 이 도시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멤링의 작품은 풍부한 질감과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 표현, 그리고 금색 배경을 사용하지 않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또한 여러 개의 패널로 구성된 다폭 패널화에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풍경의 묘사로 통일감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구별된다. 특히 그의 초상화의 주인공은 풍경을 배경으로 3/4 각도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래쪽 측면을 향하는 시선을 통해 경건함과 내적인 심리상태를 나타냈다. 이와 같은 혁신적인 표현법은 후대 미술가들에게 끊임없이 모방되었다.
멤링의 작품에는 초자연적인 고요함이 그림 전체에 충만해 있다. 모든 배경과 인물들은 질서 정연한 완벽함 속에서 빛을 발하며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다. 멤링은 종교적인 묵상에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장면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과 차분한 묵상을 이끌어낸다.
주요 작품에는 《최후의 심판 세 폭 제단화 The Last Judgement Triptych》(1467~1471), 《노파의 초상 Portrait of an Old Woman》(c. 1470), 《예수의 수난 장면 Scenes from the Passion of Christ》(1470~1471), 《돈느 세 폭 제단화 The Donne Triptych》(1480) 등이 있다.
최후의 심판 _ oil on wood _ 221 X 161cm(중앙 패널), 223.5 X 72.5cm(좌우 날개) _ 1467 - 1471
한스 멤링(Hans Memling _ 1440 - 1494)은 그동안 보았던 그림 중 가장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곰브리치의 책에서 처음 접한 그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듯하다. 그의 섬세한 필체와 감성은 그것을 더욱 빛나게 해주며, 그의 신앙심을 확인해주는 듯 하다. 그가 묘사한 천국과 지옥, 그리고 부활의 세계는 브뤼헬이나 보슈가 그리고자 한 신앙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는 죽을 떄까지 다른 예술가들처럼 양식 상의 혁신(곰브리치)은 없었으나,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기존의 양식을 섬세하게 갈고 닦았다. 보슈와 멤링, 서로 다른 둘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당대의 유행에 따라, 삼면화(triptycon)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삼면화이기도 하다. 중앙 패널은 예수를 중심으로 구도가 안정적으로 짜여져 있고, 예수의 우아한 손동작을 보좌해 주는 성인들이 있고, 그의 발 밑에 대천사 미카엘이 죄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들고 있다. 그림은 예수와 미카엘을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승리의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들을 양 옆으로 하고 미카엘은 예수의 권능에 따라 죄를 심판한다. 오른 쪽에는 패널로 연결되는 지옥으로 가는 죄인들과 그들에게 채찍질하는 악마들이 있다.왼쪽에는 마찬가지로 패널로 이어지는 천국으로 가는 선인들이 있다. 그런데 멤링은 좌우대칭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 재치있는 장면을 삽입하였는데, 천사와 악마가 한 이를 두고 싸우는 장면이다. 아마 이들은 망자(亡者)의 죄와 선의 무게를 두고 싸우는 것일 게다.
오른 날개 패널은 지옥의 모습이다. 지옥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는 보슈 - 그는 지옥의 처절함, 그로테스크한 악마, 악인과 무간도를 초현실적으로, 그래서 더욱 현실감이 드는 무시무시함으로 지옥을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했다 - 일 것이다. 멤링은 그와는 다르게 지옥조차도 아주 우아하게 표현하였다. 개성없는 악마의 모습은 절제된 동작을 보여주고 있고, 오히려 지옥에 떨어진 악인과 불신자들, 타락한 종교인들에게서 강한 개성을 찾을 수 있다. 왼쪽 위에서는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천사가 연주하며 지옥을 흘깃 쳐다본다.
왼쪽 날개 패널은 천국으로 가는 행렬이다. 천국의 문 앞에서 천국의 수문장 베드로가스정석으로 이루어진 천국의 계단 아레에서 다정하게 천국으로 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 준다. 베드로 발 밑에 묘사된 수정석을 보면 한스 멤링이 얼마나 섬세하고 매끄러운, 세련된 터치를 사용하는 지 알 수 있다. 문 앞의 천사들은 선인들에게 경의의 눈빛으로 이들에게 혼례복을 입혀주고 있다. 입구 이층에서는 다른 천사들이 영광의 찬가를 연주하고 있으며, 위대한 고딕식 천국의 문 안으로는 찬란한 황급빛이 새어 나온다.
삼면화는 이 시기 가장 인기있는 형식 중 하나였다. 문맹률이 높은 유럽권에서 종교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것이 바로 예술이다. 가장 민중적인 형식으로는 판화가 있었다. 가장 귀족적인 형식으로는 바로 이 삼면화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면화는 낱장으로 이루어진 그림도 아니었으며 삼면 혹은 사면이나 오면(머리나 꼬리 그림) 등 변형이 가능했고, 다면화로 만드는 액자 역시 그림 못지 않게 꾸미는데 열성이었기 떄문이다. 그리고 이 삼면화들은 주로 교회의 가장 큰 행사, 예컨대 부활절과 같은 때만 공개했다.
삼면화는 주앙을 중심으로 이어진 날개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종교적 특성을 가진다. 주로 예숭의 일생이나 최후의 심판 같은 주제가 가장 인기있는 주제로 사용 되었다. 몇몇 그림들은 삼면화를 접을 경우 다른 그림이 나오는 제단화도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아마 이 그림에도 해당하는 얘기일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실물을 보고 싶은 그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그림이 위대한 이유는 한스 멤링이 이 그림을 통해 위대한 실험을 했기 떄문이 아니다(오히려 그는 평생 한 가지의 양식을 발전시킨 보수적 양식의 천재였다). 이 그림이 위대한 이유는 15세기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형식적 관심사 - 극단적 세부 묘사, 물감의 운용 - 를 다른 뻔한 화가들처럼 형식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세계를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세부 묘사와 미카엘의 갑옷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광택의 물감 운용은 종교적 열망을 위한 것이었다. 이 점은 그와 보슈, 그뤼네발트 들과 같은 위대한 화가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한스 멤링은 이 그림을 브뤼헤에서 메디치 은행의 중개인으로 일한 야코포 타니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 이 제단화는 화물선에 실려 피렌체로 운송되었다. 해로가 육로보다 안전했기 떄문에 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대작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 해안에서 해적 폴 베네케의 습격을 받게 되어 다른 노획품과 함꼐 그단스크로 옮겨졌다. 이 작품은 이후에도 메디치 가문, 교황 비오 2세, 프로이센의 왕 등 유럽의 최고 권력자들이 앞다투어 손에 넣고자 하였다. 폴란드에서의 전쟁 이후 이 그림은 나폴레옹에 의해 루브루에 보내졌고, 괴링에 의해 투링기아로 옮겨졌으며,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에르미타슈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그단스크의 Narodow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느 글에선가 카를 리프크네히트(1871 - 1919 _ 독일의 공산주의자, 스파르타쿠스 단의 지도자. 제1차 대전 중 전쟁 공채 발행을 동의한 사민당에 반발해 당 규율을 거스르며 반대표를 던졌다. 독일 혁명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어 '모든 권력을 레테 : 독일 평의회로!'를 주장하였으며, 사민당 우파에 의해 로자 룩셈부르크와 암살 당했다. 대표 저서는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가 있다 )가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을 듣고, '이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럽고 감동적인 것은 없다'고 한 말을 본 적 있다. 만약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한스 멤링의 이 그림을 봤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럽고 감동적인 것은 없다'
출처 : by 이희욱 (http://lenin.egloos.com/4700793)에서
1485, Oil on wood, 191 x 84 cm
Staatsgalerie, Stuttgart
한스 멤링의 그림을 보면 밧세바를 희대의 요부로 부각시킨 화가들의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목욕을 끝마친 밧세바가 욕통의 커튼을 젖히고 한쪽 발을 내밀며 나오는 중이다. 욕의를 걸치고 욕조 밖으로 나오는 밧세바의 매혹적인 나체는 고딕식 누드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작은 유방, 긴 허리, 볼록한 복부, 가녀린 몸매가 더없이 색정을 자극한다.
멤링 이전의 화가들은 여인의 누드를 그릴 때 관능성이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성별을 구별하기 힘든 몸매에 간신히 유방의 형태만 묘사하여 겨우 여성임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이처럼 누드를 에로틱하지 않게 표현한 것은 행여 남성들이 음욕에 빠져 신앙심을 버리고 타락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myengi2005/128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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