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그림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namsarang 2011. 4. 10. 14:38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1669년)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1669년)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1]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파일:Rembrandt Harmensz. van Rijn 144.jpg

자화상(Self-portrait with wide-awake hat)

1632년의 렘브란트, 그는 이 때 이런 스타일로 최신 유행을 이끄는 성공한 초상화가이었다.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레이던에서 방아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콥 판 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하였다.

 

1625년 개인 화실을 연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지도를 받으면서 미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으며, 이를 계기로 1632년 거처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외과 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툴프 박사의 해부>를 제작하여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642년 <야경>을 제작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에 정열을 기울였다. 1656년 파산 선고로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끼니마저 굶는 만년의 비참한 생활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그림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야경> 제작 이후 무너진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끝끝내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주요 작품

  •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2년) - 마우리스하위츠, 헤이그
  •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 야경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 (1642년) -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 세 개의 십자가 (1653년) - 국립도서관, 파리
  • 밧세바 (1654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파일:Rembrandt Christ in the Storm on the Lake of Galilee.jpg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갈릴래아 호수의 폭풍)

 

파일:Rembrandt Harmensz. van Rijn -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jpg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돌아온 탕자)

 

파일:The Nightwatch by Rembrandt.jpg

야경

The Company of Frans Banning Cocq and Willem van Ruytenburch, known as the 'Night Watch'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널리 '야경'으로 알려졌다)

 

파일:Rembrandt Harmensz. van Rijn 007.jpg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출처  : 위키백과

 

 

 

 돌다리가 있는 풍경

그의 그림에는 꼭 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가 하면 어두운 죄악 세상이 대비가 됩니다. 이 그림에도 역시 우측 하단의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좌 상단의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건너야할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돌다리입니다. 이 돌다리가 바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엠마오의 그리스도]Supper at Emmaus
1648, Oil on canvas, 42 x 60 cm, Musee du Louvre, Paris

[엠마오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23장 30-31절을 소재로 한 것으로, 부활절 오후 늦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가 두 제자와 동행하였으나, 제자들은 집에 들어가 그가 빵을 떼어 나눠 줄 때까지도 부활한 그리스도인 줄을 몰랐다. 이그림은 그들이 집에 들어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리스도가가 빵을 떼어 나누어 주는 장면으로, 이는 바로 최후의 만찬인 동시에 성찬식이며 인류를 삶과 죽음으로 나누는 역사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gospelnews의 블로그

중에서

 

세개의 십자가, 1653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밧세바>, 밧세바렘브란트, 1654, 캔버스에 유채, 142x142, 루브르.

렘브란트의 그림 <밧세바>의 모델은 그의 두 번째 아내 헨드리케 스토펠스를 모델로 해서 그렸습니다. 아내라곤 하지만 죽은 첫 아내의 유산으로 먹고 살며 그림을 그리는 형편이라 소위 혼인 신고를 하지 못해 법적으로 인정받은 아내는 아닙니다.

참 구차하고 치사한 형편이지만 재혼을 하면 죽은 아내의 유산덕으로 연명하는 밥줄이 끊기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밧세바는 성서에서 나오는 장수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장수의 직속상관인 왕이 그 여인에게 욕정을 느껴 장수 우리야를 전장에 보내 죽게 만듭니다. 밧세바가 들고 있는 편지는 왕의 소환장입니다.

 

궁궐로의 소환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는 밧세바는 깊은 근심에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밧세바의 근심이라기보다 새 아내 헨드리케의 근심이며, 또한 렘브란트의 깊은 근심이기도 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밧세바>는 여성의 누드이지만- 대개의 누드가 적지 않은 경우,  남성의 눈요기로 전락하기 십상이지만  이 누드는 차라리 참혹합니다.

거기엔 티치아노, 조르조네, 틴토레토, 보티첼리, 벨라스케스, 앵그르등등 서양 회화사 최고급 대가들의 매끈하고 사뭇 선정적이기 조차 한 누드에 비해 밧세바는 남자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가꾸지 못해 망가진 몸매입니다.

 

하녀가 매만지고 있는 발과 다리는 아예 농부의 발에 견줄 만큼 투박하고 거칠기조차 합니다. 왼쪽 가슴은 어떤 병증으로 푸르스름하며 그 역시 그다지 탐스럽지 못한 가슴입니다.

도대체가 팔려고 그린 것인지 의문일 정도로 밧세바라는 여성의 육체가 주는 매력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렘브란트의 정직함이 있습니다.

 

그림을 실질적으로 구매하는 -고액으로 사 줄 수 있는- 귀족이나 중산층 이상 계층의 기호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린 화가가 얼마나 되겠냐마는 렘브란트는 정녕 예술적 양심에 따라 그린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유화나 특히 부식 동판화들을 보면 가난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화나 역사적인 영웅을 그리는데 급급한 시대에 유랑하는 악사나 방랑하는 농민을 그린 렘브란트. 그 점에서도 우리 민중 미술에 비해서도 벌써 수 백년 앞섰습니다.

 

동아누리 토크토크[글쓴이 : 목로주점 (namgang333)]중에서

 

 

<라자로의 부활> 1630년 렘브란트 반 렌(1609-1669),

캔버스에 유채, 96.3*81.3Cm, 로스엔젤레스 미술관, 미국

 

            성화해설 : 박혜원(소피아)

  동굴 안을 연상시키는 암흑의 어두운 공간이 있고 화면 좌측에는 바이올렛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려, "라자로야 일어나라"고 외치자. 벌써 관 속에 들어가 부패디기 시작한 라자로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당시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명암법. 즉 명암의 강렬한  대조로 주제가 부각되도록 그리는 극적인 표현법으로 그려진 이 걸작은 렘브란트가 불과 20세일 때 그려진 것으로 이는 "빛과 암흑의 마술사"의 암흑으로 부터 비추어진 빛에 의해 신비롭게 연출되는 기적의 메시지를 더욱 성스럽게 다가오도록 해준다. 여기서 빛은 예수의 손과 그 아래에서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는 여동생 마리아 또는 마르타의 모습과 여인 뒤의 노인의 모습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의정부 주보 <2011.4.10>중에서)

 

 

<엠마오의 그리스도>

1654, 렘브란트 반 렌(Rembarandt van Rijin, 1606-1669),

동판화(etching:에칭), 12.5*16Cm, 파리 국립도서관, 프랑스

 

성화해설 : 박혜원(소피아)

   엠마오로 향하던 길에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처음에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들이 날이 저물어 한 집에 머무르기를 권했다. 이 장면은 바로 식탁에 앉은 예수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눠주시자 순간 제자들의 눈이 열려 그가 바로 부활한 그리스도임을 알아보는 순간이다. 큰 휘장이 드리워진 뒷 배경 앞에 수평의 식탁이 그리고 그 중앙에는 빛이신 그리스도가 스스로 눈부신 빛을 발하며 앉아 있다. 그의 양 옆에는 놀라워하던 남자가 계간 난간을 잡고 뒤돌아 보고 있다.

   섬세하고 그래픽한 선의 맛을 동판화 중에서도 동판에 직접 새겨 강렬한 표현을 가능케하는 드라이포인트 기법(drypoint)으로 제작되어 명암대비가 더욱 인상적이다.  렘브란트는 무려 300여 점이 넘는 동판화를 남겼는데, 명암법(chiaroscuro)에 매료된 그는 색 사용이 배제된 흑백의 명확한 대비를 통해 화면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더해주는 에칭(etching: 동판화)을 마치 스케치를 하듯 많이 만들어냈다.                                                                             (의정부주보 <2011. 5. 8> 중에서)

 

 

 

<화목한 가정>

 렘브란트 반 렌(Rembrandt van Rijn, 1606-1669), 목판에 유채,66.5 x 78cm, 암스텔담 국립미술관, 네덜란드

 

높은 천정의 어두운 실내가 있고, 그 중앙에는 성경을 읽고 있는 젊은 아낙네가, 그 맞은편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묵주알을 굴리며 기도하는 노파 그리고 바구니 안에는 새근새근 깊이 잠든 아기의 모습이 평화롭게 그려져 있다. 벽에
드리워진 노파의 그림자는 그녀의 영혼을 담아낸 듯 영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화목하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성가정의 평화로운

순간이 거룩한 침묵 속에 그려지고 있다. 암흑 속 중앙에 강렬한 빛을 비추이는 명암법을 이용하여 드라마틱한 화면 구성을 한 바로크

시대의 거장 렘브란트.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그에게 성경은 삶의 일부분이자 중심축이었다.           성화해설: 박혜원(소피아)

 

- 의정부주보 2011년 9월 4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