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성화이야기

장발 화백 미공개 성화 공개

namsarang 2011. 9. 14. 21:54

 

 

 

장발 화백 미공개 성화 공개

▲ 장발 화백의 유작 '순교자 정하상과 가족'(1987년),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 형성에 기여하고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했다.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누이동생 정혜도 뒤를 이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박해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힌 호교문서 「상재상서」와 승리의 상징 올리브 가지, 그리고 칼이 순교자 가족임을 한눈에 알게 해준다.


▲ 1975년 작 나비가 있는 자화상, 이 작품 속 나비는 부활을 상징한다.


   

한국 서양화단의 개척자이자 성미술 선구자인 우석(雨石)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의 미공개 성화 25점이 국내에 처음 공개된다.
▶관련기사 14면

 지난달 미국에 거주하는 장 화백의 딸 장예숙씨로부터 부친 유작 80점의 이미지 파일 사용권을 기증받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이 가운데 '순교자 정하상과 가족', '십자가상의 예수' 등을 엄선해 분도출판사 2012년도 달력을 통해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왜관수도원은 나머지 성화도 엽서 등으로 제작해 소개할 예정이다.

 우석이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며 그린 이 성화들은 토착화에 기반을 둔 그의 독창적 화풍을 대표할만한 작품들이라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작품들은 한국적 정서가 녹아있고, 전통 채색기법이 돋보이는 비구상 회화가 대부분이다.

 주제도 다양하다. '성모자''성모영보''성가정'등 성모신심을 바탕으로 한 작품과 '순교자 정하상과 가족''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 한국교회의 대표적 순교자들을 기리는 작품 등이다. 유화뿐 아니라 유리화, 판화 등 기법도 다채롭다.

 우석은 1946년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에 취임해 1964년 도미(渡美) 전까지 국내 서양화단과 가톨릭 성미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다. 그가 19살에 그린 유화 반신상 '김대건 신부'(서울대교구 소장)는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성화다. 신자들 눈에 익은 명동대성당 벽화 '14사도상'과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도 그의 작품이다.

 분도출판사의 내년도 달력은 이달 중순께 발행된다.

이서연 기자 kitty@pbc.co.kr

 

 

장발 화백 미공개 성화, 분도출판사 2012년도 달력으로

   한국 성미술 토착화에 준거 제시






   분도출판사 2012년도 달력을 통해 곧 공개될 우석(雨石)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 미공개 성화들은 오랜 세월을 성화 제작에 바친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교회에 '토착화'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그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옷을 한복으로 갈아입혔다. 또 전통 채색기법과 이콘 기법으로 화면을 구성해 한국적 성화의 독창적 길을 제시했다.

 이번에 공개된 성화 25점은 모두 망명지나 다름 없는 미국에서 그린 것이다. 우석의 친형이자 제2공화국 총리였던 장면(요한) 박사가 5ㆍ16 군사 쿠데타(1961년)로 실각하자 일가족은 군사정권의 압박을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

 우석의 화풍은 독일 보이론수도원풍의 작품과 프랑스 나비파 영향을 받은 구상(1920~1940년대)→서체적 추상 표현주의(1964년 도미 이후~1970년대)→독자적 성화의 세계(1980년대 중반 이후) 흐름을 보인다. 이 성화들은 대부분 말년에 완성한 것들이라 한층 원숙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특히 작가는 오랫동안 미국에 살았으면서도 한국 전통과 심성에 대한 뿌리의식을 잃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은 한국 성미술 토착화에 또 다른 준거(準據)를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분도출판사 달력에 실릴 그의 작품을 지면을 통해 미리 공개한다.
이서연 기자 kitty@pbc.co.kr

  ▨우석 장발 화백은

 19살에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그린 우석은 한국의 첫 성미술 작가로 불린다. 명동대성당 제대 뒤에 있는 유명한 벽화 '14사도상'(1925년)도 그의 작품이다.

 우석은 1960년 서울 혜화동성당 신축공사때 자신의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설계와 조각 제작을 총지휘했다. 혜화동성당은 서양 선교사 도움 없이 한국인 건축가와 미술가들 손으로 지은 최초의 성당이다. 우석의 열정적 신앙과 창작활동에는 프란치스칸 사상이 내재돼 있다. 우석은 형 장면 박사와 함께 재속 프란치스코회(재속3회)에 입회, '세상 속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서구식 미술교육 기틀을 다진 교육자이기도 하다. 우석은 백수(白壽)를 넘기고 2001년 4월 8일 미국 맨해튼 피츠버그 자택에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