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 유래와 의미
| ▲ 성모 승천 대축일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려진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림은 예루살렘 성모영면성당에 있는 '성모 승천' 이콘. |
8월 15일은 성모 승천, 즉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려진 것"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이날 모든 신자는 주일과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지내면서 미사에 참례할 의무가 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짚어본다.
▨성모 승천 교리
성모 승천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아니다. 성모 승천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한 이는 4세기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오다. 당시 많은 교회 문헌이 승천을 비롯한 성모 마리아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에피파니오 주교는 성모 승천의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하느님 흠숭과 성모 공경을 구별했다. 지나친 성모 공경을 우려한 까닭이다.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6세기 투르의 그레고리오에 의해서다. 성모 승천 교의는 8세기 들어 신학적 근거를 갖고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대 알베르토(1206~1280),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보나벤투라(1217~1274) 등 신학자와 베네딕토 14세 교황(재위 1740~1758)이 이를 확인했다. 1870년께부터 교황들은 성모 승천 교의를 공식화하자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마침내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은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을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공식 선포했다. 1950년이면 우리나라에서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셨다"(「교회헌장」 59항)며 성모 승천을 정통 교리로 재천명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마리아가 자신의 힘으로 하늘에 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하늘로 들어 올려진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은 수동적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구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적 권능에 의한 능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부른다. 성모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마찬가지로 '하늘'이라는 공간으로 올라갔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충만한 영광에 들게 됐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모 승천 대축일 유래
교회가 언제부터 성모 승천을 성대하게 기념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다만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축일은 4세기께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가 성모 승천을 공적으로 기념한 것은 5세기 초 예루살렘에서 8월 15일을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축일로 지내면서부터다. 교회는 6세기께 이 축일을 '성모 안식 축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교회는 순교자와 성인들을 그들의 선종일에 맞춰 기념하는 관습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성모 마리아가 하늘나라로 올림을 받아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성모 안식 축일'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치우스(582~602)는 제국 전체가 이 축일을 지내도록 했다.
이 축일이 로마교회에 전해진 것은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피난 온 동로마 제국 내 수도원들 영향으로 추측된다. 세르지오 교황(재위 683~701)은 다른 성모 축일에서처럼 이날 행렬을 하도록 권함으로써 축일을 더욱 성대하게 지내는 데 기여했고, 레오 4세 교황(재위 847~855)은 팔부 축일로 지정했다. 니콜라오 1세 교황(재위 858~867)은 이 축일을 부활 대축일, 성탄 대축일, 성령강림 대축일과 같이 대축일로 기념하도록 했다. 교회는 16세기 '로마 성무일도'에 성모 승천 팔부 축일을 삽입했다. 1970년 미사 경본 개정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전야 미사가 인정되는 유일한 마리아 축일이 됐다.
현재 성모 승천 대축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 8일)과 함께 교회 전례력에서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기념하는 대축일 가운데 하나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마리아 축일로 기념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과 함께 신자들이 반드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의무축일로 지낸다.
▨성모 승천 의미
교회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각별한 영예와 공경을 드리는 것은 성모 마리아가 구세사에서 수행한 역할 때문이다. 마리아는 처녀임에도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느님 말씀을 순명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는 데 일생을 바침으로써 구원사업의 뛰어난 협조자가 됐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됐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모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지상생활을 마친 후에도 육신이 부패되지 않고 영혼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 속에 들게 됐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성모 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의 표지가 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1974년 발표한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마리아의 완전하심과 복되심, 동정의 몸과 흠없는 영혼이 누리시는 영광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심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라며 "따라서 이날은 교회와 전 인류가 바라던 종국적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일"이라고 밝혔다. 성모 승천은 구원의 역사가 완성됐을 때 그리스도를 따랐던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앞서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생을 하느님 뜻에 순명한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일상생활에서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깊이 헤아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 심순화 가타리나 작 '성모 승천'(2001년). |
▨성모 신심과 한국교회
성모 승천 대축일과 한국교회는 각별한 인연이다. 우리나라는 1945년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고, 3년 뒤 같은 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광복절과 대한민국 건국일이 성모 승천 대축일과 겹치면서 신자들 사이에는 해방과 건국이 한국교회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가 도우신 결과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는 또한 성모신심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사실 한국교회 성모신심은 초창기부터 활발했다. 한국교회 성모신심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꽃을 활짝 피운다. 선교사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널리 퍼지던 성모신심, 특히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과 전통을 한국에 그대로 전수했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8년 교황청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요청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이를 승인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서울 명동성당은 1898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됐다. 또 국내 첫 본토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를 수호성인으로 1932년 설립됐다. 한국전쟁 직후 레지오 마리애,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성모기사회 등 성모신심 단체들이 대거 한국교회에 진출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리 선포 100주년이던 1954년 한국 주교단은 성모 성년 대회를 열어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성모 마리아께 공식적으로 봉헌했다. 또 1984년 한국을 찾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명동성당에서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를 마리아께 봉헌했고,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는 2000년 대희년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일치를 위해 묵주기도 3억 단을 봉헌하기도 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교회 성모신심은 이처럼 면면히 이어져 오는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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