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성화이야기

<3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7)

namsarang 2013. 9. 2. 00:17

[가톨릭 문화산책]

<3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7)

 

채찍질 후 고통스런 예수, 우리 마음에도 그려져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주겠소"(루카 23,16)

작품 : '채찍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
벨라스케스 작(1630년께, 런던 내셔널갤러리)

 ● 고통의 신비 2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육체적 고통, 순종, 신뢰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겟세마니로 가서 기도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유다의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이 보낸 병사들에게 잡혀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채찍질을 당했던 사실을 기록한다.

 하지만 루카는 예수가 처형당할 만큼 죄가 없으니 채찍질이나 몇 번 하고 풀어주라고 빌라도가 명령한 사실을 전한다. 예수 수난을 주제로 다룬 작품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겪은 잔인한 육체적 고통과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이는 예수가 구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정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역시 예수에 대한 육체적 고문보다는 예수의 인내의 참된 가치와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더 초점을 둔다.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채찍질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란 긴 제목의 작품은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기도', 그리고 성녀 비르지타가 어렸을 때 예수 수난을 체험한 신비 때문에 '성녀 비르지타의 환시'로도 불렸다.
 예수께서 막 채찍질 당하신 뒤 장면이다. 바닥에는 채찍 도구들이 널려 있다. 그림 왼쪽 끝에는 단단한 기둥이 세워져 있고, 커다란 돌기둥에 두 손이 묶인 예수는 한가운데를 바라보며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앉아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한 어린아이가 두 손을 꼭 모으고 있고, 그 옆에는 천사가 서 있다. 무방비 상태로 앉은 예수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를 향해 보호받기를 원하는 듯하다. 천사는 어린아이에게 "보아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채찍질을 당한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의 힘없고 고통스러운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가슴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 

 벨라스케스는 그리스도를 아름다운 몸으로 묘사한다. 비록 모진 채찍질을 당한 후라 매우 지쳐 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보다 수려하다(시편 45,3)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생애 최초로 이탈리아를 다녀온 후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던 시기의 작품답게 여러 가지 영향을 풍부하게 섞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에서 여러 대가와 만나고 고대 작품을 연구하고 나서 인간 형상을 다루는 데 최고조의 능력을 발휘한다.

 작품은 장식적 요소 하나 없이 아주 단순하다. 작품 배경은 벨라스케스 자신이 젊은 시절 감동을 받았던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으로 처리하고, 그와 대비시켜 힘없이 앉아 있는 예수의 몸과 어린아이는 밝게 처리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두 팔이 고통스럽게 기둥에 매달린 예수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묘사돼 육체적 고통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단순한 구성으로 주제에만 주의를 집중시킨다.
 
깨끗한 눈과 마음의 어린아이  

 벨라스케스는 채찍질을 당한 예수를 표현한 장면에서 고문자들은 배제하고 어린아이만 등장시킨다. 예수를 바라보는 깨끗한 눈과 마음의 어린아이의 순수성이 마치 예수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이 어린아이만이 예수의 고통을 진정 이해하는 듯하다. 한편 그림 제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아이는 그리스도인(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나타낸다.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예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호천사의 인도로 이미 예수 피땀으로 얼룩진 기둥과 앞에 놓인 고문 도구들을 바라보며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작품을 이렇게 하나의 시각적 묵상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다.
 
 수난에 관한 시각적 명상

 벨라스케스의 이 작품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 방법론과 함께 가톨릭 개혁기 스페인의 영성과 종교미술이 나가던 방향을 잘 보여준다. 「영신수련」은 예수의 삶과 부활 이야기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예를 들어 시각적 묘사로 가득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장소를 상상하며 명상을 구성한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이 사건에 참여해야 한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비탄에 빠진 그리스도와 함께 눈물과 애끓는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겪으신 그 많은 아픔을 함께 느끼기를 청하는 것이다.(「영신수련」 203항)

 13세기 초부터 예수가 겪은 고통과 그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 새로운 신앙적 흐름이 형성된다. 중세 말부터 전해오는 가톨릭 묵상법 가운데 하나인 보나벤투라의 「그리스도 일생 명상」은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이다'라고 할 때에,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더라도 이를 영적 명상의 조건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가 마치 '예수께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셨다고 가정해보자'라고 말한 것처럼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 명상에서 영적 혜택을 받으려고 한다면 세속의 걱정거리를 모두 떨쳐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그 순간에 항상 함께하라"고 말하고 있다. 묵상적 이미지를 그려내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는 신비를 체험할 수 있어서다. 묵상할 때 마음을 집중해 마치 그리스도의 수난이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마치 주님께서 당하시는 수난을 우리가 직접 당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며,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직접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채찍질을 당한 예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바라보며 우리는 수난의 고통을 공감한다. 이렇듯 시각적 이미지는 상상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을 체험하도록 해준다. 한 예로 14세기 영국 신비주의자 노리치의 줄리언 수녀는 "이후 나는 눈앞에 있는 십자가상을 계속 바라봤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모욕과 채찍질, 일그러지고 멍든 그리스도의 상처,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봤다"고 기록에 남겼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의 전 과정을 집약하고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느님의 요구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저버리지 않는 순종과 신뢰! 예수의 구원의 힘의 너비와 길이, 높이, 깊이는(에페 3,18) 예수께서 당한 난폭한 육체적 폭력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쏟아 부었던 사랑의 깊이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작품 :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만테냐 작
(1455년께, 런던 내셔널갤러리)

● 고통의 신비 1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고뇌의 기도, 외로움, 순종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나눈 뒤 세 제자와 함께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서 하느님께 고뇌의 기도를 올린다.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고 말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 뜻대로 따르겠다고 기도한다.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의 그림에서 보듯이 예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늘에는 천사들이 앞으로 다가올 예수 수난을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있다. 언덕 아래에는 그를 따르기로 자처한 제자들이 무심히 잠만 자고 있고, 화면 오른쪽 멀리에는 유다가 병사를 앞세워 예수를 잡으러 온다. 제자들과 함께 있어도 예수께서는 홀로 깨어 외롭게 기도하며 자신을 아버지께 맡긴다. 그림 오른쪽 나뭇가지 위에는 사다새(펠리컨)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어미가 자신의 가슴을 쪼아 흘러넘치는 피로 배고픈 새끼들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다새가 상징하듯이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윤인복 교수 (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