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한 신부(요한, 작은형제회)
제 목: 삼위일체 (1427년 작) 작 가: 조반니 마사치오 (1401- 1428) 크 기: 667 X 317cm, 프레스코화 소재지: 이태리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三位)가 한 분(一體) 하느님이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야훼 하느님의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세 위격(Persona)에 있어 완전히 구별되면서 동시에 한 신성(神性)을 이룬다는 뜻인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덕분으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교 구원에 대한 근본교리를 요약하는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神) 개념 이해에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면서도 이것은 설명도, 알아듣기도 어려우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내용에 답답함이 있다.
이 그림은 27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던 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죽음 앞에 바친 진혼곡(Requiem)이며,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음울한 묵상이기에 작가의 다른 그림과 달리 색채 처리가 전체적으로 어둡게 표현되고 있다. 중앙 부분의 성부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달려 늘어진 아들의 팔을 부축하고 있는데, 이 두 분의 형상은 전체 균형에 안정감을 주면서 장엄한 표현이 되고 있다.
그전 작가들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항상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리면서 심판주로서의 역할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는 승리자이신 하느님으로 묘사했으나, 작가는 이런 기존 틀에서 벗어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성부께서 받들고 계신 것으로 그린 것은 두 분 사이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과 함께, 이것이 제단화이기에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거양성체 때 이 그림을 우러러봄으로서 성찬을 통해 표시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더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자는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으로 땅을 딛고 있지만 성부는 천상적 존재이기에 죄 많은 세상에 발붙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성자를 부축하고 있는 공중에 뜬 모습으로 그리면서 성자의 구속자적인 역할의 강조와 두 분 사이의 특성을 명확히 구분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은 전통적인 표현처럼 당신 아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관객에게 돌려 손으로 십자가에 달린 당신 아들을 보라고 초대하시고, 사도 요한은 이런 성모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응시하고 있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은 이 그림을 봉헌한 기증자 내외이다.
이 그림의 백미는 십자가에 달린 성자를 부축하고 계신 성부의 붉은색 가슴을 덮고 있는 수염으로부터 나와 성자의 머리 위를 비추는 흰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시다.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극심하고 처참한 고통을 통해 표현되는 사랑의 교차로에서 성삼위가 서로 만나고 있는데, 이런 삼위일체가 보이시는 사랑은 신앙 없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역설이며 모순투성인 그런 사랑이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관계를 지탱케 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 사랑인데, 작가가 전통적인 표현의 비둘기로서 성부의 가슴으로부터 성자의 머리로 내려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성삼위의 관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의 운명애(Amor pati)와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어느 면으로 보든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도 사랑을 하는 것, 어떤 참혹한 처지에서도 세상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가장 숭고한 사랑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처절한 고통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라 믿었기에 작가는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그 매력적인 사랑의 표현들이 바로 삼위일체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