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성화이야기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1871)

namsarang 2011. 5. 15. 16:54

성화이야기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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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1871)
작가 : 안토니오 치세리(Antonio Ciseri: 1821- 1891)
크기 : 캔버스 유채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근대 미술관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당하시기 위해 체포되신 예수님께서 재판정에서 있었던 과정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와 “유대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요.”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하자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요한 1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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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안토니오 치세리는 스위스 출신으로 일찍이 이태리 피렌체에 와서 예술 수업을 받아 르네상스의 진원지였던 피렌체의 풍요로운 유산을 습득하면서 자기 나름의 화풍을 구축했다. 그는 르네상스 대표 화가로 이름을 날린 라파엘로의 화풍을 이어받아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서처럼 정확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마치 사진을 보듯 선명히 성서의 내용을 회상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어떤 군더더기나 인간적 상상력이 다 배제한 상태에서 성서의 내용을 사진을 찍듯 표현하면서 관람자들에게 성서를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읽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전체의 배경 설정은 예루살렘이 아닌 당시 세계 최강국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의 중심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를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세상의 권력과 하느님 나라의 실상을 극명히 대조시키고 있다.

중앙에 로마제국을 확장시킨 영웅인 트라얀 황제의 기념기둥이 보인다. 이 배경 설정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받으실 때 하신 다음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9: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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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제들의 사주를 받아 폭도로 변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끌고 와 법정에 세우고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사형 허락을 청하고 있다.

예수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으나 몸 전체로 고통에 가득 찬 상태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 인간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처럼 이 세상에 가장 실패한 인간의 상징이라면 빌라도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쥔 성공과 힘의 상징임이 붉고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은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밝고 화사한 로마 귀족의 옷인 토가를 걸친 빌라도에게서 극명이 드러나고 있다.

힘과 승리의 상징과 같은 빌라도 곁에 너무도 무능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계신 예수님은 성서의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야 50: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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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엔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모인 일단의 무리가 있는데, 창과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로마 병사의 투구가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막강한 힘의 상징이며 그들은 무엇이나 자기들이 마음먹은 것은 해낼 수 있는 세상 힘의 상징이다.

여기에 반하여 오른 편엔 몇 명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있는데 평소에 그분을 따랐던 부녀자들이다. 존경하며 따르던 스승이 무구하게 사형의 선고를 받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하는 나약한 인간 군상들이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은 하느님의 뜻에 매달리는 게 전부이다. 성서 전체에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상징과 같다.

“나는 네 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 스바니아 3:12)

그 앞에 검은 모습의 한 사람이 서있는데 예수님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바라빠 (요한 18:40)이다. 성서에 의하면 그는 어떤 폭동의 주모자로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한 구실의 반사효과로 석방된 인간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구원 효과를 처음으로 받은 인간이며 죄인의 운명을 타고난 모든 그리스도인의 상징이다.

그다음 유다 의회의 최고 의원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새 인생을 시작한 니코데모 (요한 3:1)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의 요셉(요한 19: 38)이 있다.

이 주제를 많은 작가들이 그렸으나 작가의 작품은 수난 복음으로 우리를 끌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 전례 중에 주님의 수난기를 듣고 있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 겪으셨던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삶의 현실이기 때문에 이 작품 앞에 서면 오늘 우리의 처지가 더 절박하게 다가오게 된다.

현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오늘 세상과 교회의 현실 안에서 예수님은 누구이고 군중과 빌라도는 누구인지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정확히 예수님의 역할을 하고 있고 세상의 여러 정치 세력과 분위기는 빌라도와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광기를 피우는 군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에도 오늘도 제도적인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는 예수님의 얼굴과 함께 빌라도와 군중의 얼굴들이 항상 중복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빌라도의 모습으로 변신한 예가 속속 드러나면서 교회와 종교에 대한 실망과 신앙에의 회의가 커지고 있다.

이 작품은 오늘 교회의 현실에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우리가 정화해야 할 모습, 보여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도 극명히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