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오늘 복음 묵상 내용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묵고 계시는 곳을 가서 보고 '메시아를 만났다'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의 단순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던 요한의 제자 두 사람에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다. 그들은 "랍비,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답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들은 그 분이 묵고 계시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형인 시몬과 형을 데려온 동생 안드레아였다.
예수님이 머무르시던 곳이 도대체 어떠한 곳이기에 두 형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게 되었을까?
그 당시 유다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 왕조를 재건해 온 천하를 다스리며 정복할 분이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 구원해 줄 세상의 왕,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지상에서 당신의 무소유와 청빈을 밝히셨다.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이런 가난한 예수님을 그들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정치적 왕이 아닌 봉사하는 사랑의 메시아를 확인한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어린이 같은 단순한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고 하시며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 18,4)하고 가르치신다.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인간이 찾아야 할 하느님이며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다. 이분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말씀하신다.
생각을 바꿔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은 혼자 판단하고 해결하는 스스로 잘난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 사랑에 단순하고 겸손한 신뢰를 보내며 완전히 의탁하는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양손에 먹을 것을 가득 쥐고도 없는 아이와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하기 어렵다. 허나 낯선 사람, 고통스럽고 불편함이 있을 때 큰 소리로 운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엄마의 사랑에 절대적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엄마가 독약을 준다고 해도 믿고 마실 정도로 엄마 사랑을 무조건, 완전히 신뢰한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과 사랑도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신앙도 이렇게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강원도 어느 시골 신부님 경험담은 잊히지 않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1학년 남학생 5~6명이 학교수업이 끝나면 항상 성당 앞 빈터에서 공차기하며 놀다가 집으로 갔다. 그들 중 한 아이는 성당에 오면 꼭 성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감실 앞에 섰다. 허리에 둘러매고 온 책보를 풀어놓고 "예수님, 저 동수 왔어요"하며 절을 했다. 또 공을 차다 갈 때는 "예수님, 저 동수 가요"하고 책보를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동수는 며칠을 성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독감에 합병증인 폐렴까지 겹쳐 몹시 앓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동수의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분은 "동수야, 나 예수 왔다"하고 말하더니 "동수야, 나 예수 간다"는 말을 남기고 곧 가셨다. 동수의 병은 나았고 친구들과 성당에서 다시 공을 찼다.
동수는 커서 수사 신부가 됐다. "감실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어머니 말씀을 수사 신부는 어릴 때부터 무조건 믿었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을 수없이 체험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막연한 감정적 믿음이 아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복귀된 새로운 삶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다. 상속자가 되는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고 전인적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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