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오늘 복음은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구세주 예수가 베들레헴 고을에 탄생하시고 동방박사 3명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 몰약을 바치며 경배를 드리는 내용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스스로 밝히셨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카나의 혼인잔치 등을 통해 하느님이 자신의 인격 안에 현존하심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의 이런 공적 출현은 예수가 오시기로 약속된 구원자이시고(마태 11,1-2)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인간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선포하는 것이다.
세 동방박사는 자신이 안주하던 고향 땅을 떠나 별빛 한 줄기에 의지해 목숨을 걸고 험한 길을 순례했고 마침내 찾던 메시아 아기 예수를 만났다. 그리고 가장 값비싼 황금과 유향, 몰약을 메시아께 드리며 경배한다.
황금은 왕에게 바치는 예물이고 유향은 하느님께 드리는 향이며, 몰약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써 인간을 상징한다.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구원의 왕이며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예물들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복음에서 새 인도자, 새 이스라엘, 새 약속의 땅을 보았다. 그 새 땅으로 향해 가야 할 신자들 여정, 즉 나그네 길을 자연스럽게 끌어낸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나그네의 길'과 '순례'라는 주제는 개인과 공동체가 인생 여로에서 고난을 견디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성서 전반에 흐르는 사상이다. 긴 세월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원한 하느님 도성(「신국론」), 즉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자신에게 평화가 없다고 말했다(「고백록」). 순례하는 우리는 불확실한 나그네 길에서 '나는 누구인가?'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타인과 만나 그 존재 가치를 어떻게 볼지 고민한다.
프랑스 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 혼자는 고독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꼭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너'는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내가 찾는 '너'는 '나' 같은 '너'가 아닌 절대 '너'이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즉 '절대 이인칭'인 하느님을 만날 때 나의 고독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혼자이기에 외롭다. 또 되돌아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갖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이다. 사람들은 경제적, 물질적 부의 축적으로 이런 외로움과 고독을 메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고독은 시공간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공허다.
많은 이들이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고려할 여유도 없이 일에 묻혀 치열한 경쟁을 하며 자신을 소진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목적지를 알고 있기에 '절대 이인칭'의 존재, 곧 하느님을 요청한다.
세 동방박사는 그들 순례에 별빛의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과 성령, 성모 마리아 인도를 받으며 하느님께로 믿음과 희망, 사랑의 길인 순례를 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전설적, 신화적 존재도 아닌 인류 역사 안에서 30여년을 유다인으로 사셨던 실존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존엄하신 권위로 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며 수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도대체 저분이 누구인가?"하고 유다의 왕 헤로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예수님 정체에 의혹을 가졌다.
예수님은 그러한 율법학자와 군중,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소개하신다.
우리는 오늘도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있다. 이 나그네 길 위에서 쓰러지며 죽도록 지쳐 좌절할 때에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께서 함께하심을 기억하자. 혼자 순례 길에 들어서지만 도중에 많은 사람과 만나 서로 일깨워주고 사랑으로 배려하며 우리의 희망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함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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