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교회, 교회 자유 수호 1118(?)~1170. 영국 출생 및 순교. 캔터베리 대주교
성 토마스 베케트는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영국 가톨릭교회를 왕권으로부터 보호하고 교회 자유를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때문에 당시 국왕이던 헨리 2세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교회를 위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인은 왕의 측근들에게 살해를 당하는데, 죽기 직전 "나는 예수 이름과 교회를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영국 신자들이 믿음이 흔들릴 때면 성인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는 것은 성인이 보여준 이 같은 신앙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처음부터 교회편에 섰던 것은 아닙니다. 성인은 대주교가 되기 전 대법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때 성인은 국왕 헨리 2세의 신임을 얻고자 교회 권력까지 손아귀에 넣으려던 헨리 2세 정책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이던 테오발드 대주교가 선종하자 헨리 2세는 후임으로 성인을 임명합니다. 자신의 뜻을 잘 따르는 성인을 앉혀 놓고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같은 국왕 생각을 알아 챈 성인은 대주교 자리를 거절하지만 결국 맡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인은 국왕과 힘겨운 싸움을 시작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로 착좌한 뒤 철저하게 교회법을 따른 성인은 헨리 2세가 교회에 세금을 징수하고 성직자 권한을 제한하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또 헨리 2세가 주교들이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클라렌든 헌장을 발표했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계속 국왕과 충돌하자 일부 주교들은 성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국왕편에 서서 성인을 따돌렸습니다. 국내에서 입지를 잃은 성인은 결국 프랑스로 도피해 망명생활을 합니다. 교황 도움으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성인은 며칠 뒤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헨리 2세 측근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성인 죽음 소식에 전 유럽교회가 슬퍼했고 많은 이들이 성인 무덤을 찾았습니다. 교황은 이 사건 직후 헨리 2세를 파문했고, 1173년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를 시성했습니다. ▲12월 30일. 성 사비노와 동료 순교자. 300년 께 성 사비노는 이탈리아 스폴레토 주교였다. 당시 이탈리아 전체에 가톨릭 박해령이 내려졌다. 성인은 박해로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배교하기보단 순교할 것을 독려했다. 성인 역시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했다. 스폴레토 지역을 관장하는 시장은 성인에게 자신이 숭상하던 신을 믿으라며 이교도 성상을 줬는데 성인은 이 성상을 받자마자 내던졌다. 이에 화가 난 시장은 성인 손목을 잘라버렸다. 성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느님 말씀을 전했고, 앞이 안 보이는 이들 눈을 뜨게 해주는 등 기적을 일으켰다. 이 소식은 시장에게 전해졌고 성인은 눈병이 난 시장 눈을 고쳐줬다. 이에 감동한 시장은 가족들과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로마 황제는 이에 분개해 시장은 물론 성인과 성직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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