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1주일 -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나무

namsarang 2012. 6. 17. 17:30

[생활속의복음]

 

 연중 제11주일 -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나무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나무

▲ 서광석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 28)하고 말씀하시고, 그 하느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신다. 씨앗에 싹이 터서 순간순간의 세월과 함께 큰 나무로 자라듯, 하느님 나라 또한 이와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유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므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는 맞고 문헌적으로는 틀리다. 듣는 이에게 알아들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작은 겨자씨 비유의 본질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다. 그러나 인간 지성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씨앗의 생물학적 변화 정도일 뿐이다. 피조물 하나하나의 속성과 그 개개에 관한 창조주의 사랑과 목적은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비유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행한 작은 사랑의 행위로 공동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 나라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거울이자 시대의 표징이다.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늘의 씨앗은 하느님 은총과 더불어 그 사람 일생이라는 나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활 전체에 걸친 행복한 삶의 지수는 인간 속성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성찰 없이 제도나 윤리로 속박하는 것은 이론의 교의로 빠져들 위험이 크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편협함은 경계해야 한다. 개개 나무의 특성을 유념하는 '구체적 사랑'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하느님 사랑은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의 영역이다. 천재는 기발한 발상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경험으로 사랑의 지혜를 넓혀나가는 법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 성숙한 자는 동물 중에 최상의 동물이다. 그러나 이 사랑을 벗어나면 동물 가운데 가장 저급한 동물로 전락한다. 위선과 불의로 무장된 인간은 자신과 타인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어떻게 완전히 불행해질 수 있는가?'하는 제목의 글을 찾았다.


 "자기만 생각하십시오. 자기에 관한 말만 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나'라는 말을 많이 쓰십시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십시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하는 말에 신경을 쓰십시오.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십시오.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마십시오. 비판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좋은 시간만 고집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자기를 최고로 사랑하십시오. 이기적으로 사십시오.(…)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확실히 완전하게 불행해질 것입니다. 자기, 자기, 자기 그리고 나, 나, 나. 당신이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 자기 생각과 자기 관심만 반복하다가 지겨워서 죽을 것입니다."

 사회는 점점 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사랑과 정의가 실현돼야 함이 마땅한 것으로 점점 더 인식돼 가고, 인간과 더 나아가 창조된 자연까지도 존중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작은 겨자씨가 싹이 터서 자라 큰 나무가 되고, 숲을 이뤄 다른 피조물의 쉼터가 되듯, 신앙인 각자는 우리 안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을 키워서 다른 이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 뜻에 맞는 한 그루의 성숙한 사랑의 나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