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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
오늘 복음에서 야이로라고 하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애원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 가운데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던 여자도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분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았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따님이 죽었습니다"하고 전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만이 생로병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며, 그분만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그분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 통교하며, 신앙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살아도 죽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정동수라는 유명한 익살꾼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북적거리는 시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슨 까닭인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기 때문이오. 그게 못 견디게 슬퍼서 이리 눈물이 난다오. 아이고, 이런 변이 있나"라고 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무슨 병고로 모두 죽는단 말이오. 전쟁이나 몹쓸 돌림병이라도 났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주시오"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동수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나이 들고 늙으면 다 죽지 않는가"하고는 껄껄 웃으면서 일어나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부터 예외인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모든 외부 가르침에 앞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어에서 '믿음'의 본래 의미는 '떠나고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우상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즉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가까이하고, 더 사랑하는 것에서 떠남을 뜻한다.
우리는 매사가 숙려(熟慮)되고 실천되기보다 말로써 이해시키거나 규정되는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언어일 뿐, 그 일상적인 논리적 사유과정이 인간의 깊은 정신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성에 갇힌 삶의 범주 안에서 신앙의 신비는 이해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는 것이 된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처럼, 신앙을 굳게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삶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한다. 마침내 다 놓아버릴 준비가 된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안내하시는 보금자리로 들어갈 수 있다.
죽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라는 성경 말씀을 마음에 담고, 유한에서 영원으로, 덧없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불멸의 영광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야 함을 묵상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 여정이 '죽을 때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12년 동안 앓고 있던 여인의 하혈병을 낫게 하시고,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다. 그곳에 모인 군중이 도저히 그들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기적을 행하시고도, 당신의 전능으로 병을 낫게 하시고 살리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의 믿음이 그녀를 낫게 했고 또한 야이로 믿음이 그의 딸을 살리도록 하느님 기적을 가져오게 한 것임을 강조하신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져야 한다.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사건은 우리의 죽음 이후 영생을 얻는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인생을 마칠 때에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 신앙의 여정 동안 이웃에게 매 순간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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