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소통의 윤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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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 신학원장) |
오늘의 한국사회를 보면 제1독서에서 말하는 '어리석고 지각없는 사건'들이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6)하고 한 세상에 대한 통찰이 시대를 넘어 현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듯하다. 성경을 통해 '거친 폭력'의 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동방예의지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던 우리 사회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거친 말이 난무하고 언성은 자꾸만 높아진다. 서로에 대한 신뢰 부재를 주변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OECD 가입 이후 이혼, 자살, 낙태 수치가 치솟고 있다. 과연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적 결과는 피할 수 없을까.
인류문화 사회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다른 동물군에 비해 인간은 지속해서 폭력을 완화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폭력현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쪼개진 몸, 흘린 피
사회학적 분석에 따르면 한국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빨리빨리 문화'가 이유로 꼽힌다. 또한 빠른 속도로 이룩한 압축성장이 우리 사회 폭력성의 뿌리라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문제가 사회 전반에 걸쳐 무분별한 경쟁과 소통의 부재를 일으켜 각박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경쟁과 소통 부재의 시대를 이겨내려는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제1독서에서는 지혜는 어리석은 이, 지각없는 이에게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어라"하고 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공생활 초기부터 많은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즐기셨다.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 살면서 금욕적으로 생활했다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음식을 나누고 이웃과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사셨다.
주님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 십자가 수난 직전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식탁에서는 그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변화시키셨다. 주님의 몸과 피는 우리에게 나눠주신 생명의 양식이다. 미사 때 성찬 제정과 축성문 2양식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하고 말한다.
이처럼 주님의 몸과 피는 우리를 위해 지금도 계속해 쪼개지는 몸이요, 흘리는 피다. 이것이 성체성사 핵심이다. 당신 인생을 모든 이에게 내어주시며 주님은 사랑을 말한다.
복음에서 주님은 "진실로 말한다.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은 생명의 이론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가신 삶 자체이기에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된다.
#빨리빨리 문화와 압축성장 후유증 치유해야
우리는 미사 때, 성체성사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영성체를 통해 주님의 몸과 피는 내 안에 머무신다. 비로소 내 살과 내 피로 또 다시 변화하는 것이다. 내어주시는 사랑, 상대방이 되시는 사랑이 바로 성체성사 신비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 58).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선종 직전 당신의 안구를 앞 못 보는 한 사람에게 기증하셨다. 주님의 성체성사 사랑을 그대로 실현하신 것이다. 김 추기경의 안구가 기증받은 사람의 눈이 됐듯이, 안구기증은 오늘날 주님의 성체성사 기적을 재현한 것이다. 김 추기경의 사랑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빨리빨리 문화와 압축성장으로 인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소통의 윤활유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주님의 성체성사, 쪼개진 몸과 흘린 피를 통해 나눔과 희생을 실천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에페 5,17) 신앙인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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