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4주일 (루카 15,1-3.11ㄴ-32)

namsarang 2013. 3. 10. 23:04

[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4주일 (루카 15,1-3.11ㄴ-32)

 

우리 시대 교회의 참모습

사순 제4주일이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는(루카 15,1) 진풍경을 그려본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세리들과 하느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았다고 손가락질 당하던 죄인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을까?

 마음이 공허해서일까? 돈에 싫증이 나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삶에 불만이 있어서 바꾸기 위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모면할 방법을 찾기 위함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해 예수님 제자로 살아가고 싶은 열망 때문일까?

 세리들은 돈맛을 알 뿐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등쳐먹고 그 고혈(膏血)까지 짜냈던 사람들이다. 죄인들은 창녀와 강도, 도둑은 물론이고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식민제국이었던 로마에 대들던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된 자들이었다. 어찌됐든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에 모여든 세리들과 죄인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내몰려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사건 앞에서 종교ㆍ사회ㆍ정치적 중심에 있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린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거절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을 보고 언짢을 뿐 아니라 불쾌하기 그지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3)하고 매우 못마땅해 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그토록 못마땅해 하는가. 처음부터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했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그 모든 것을 음해하고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는데, 오랜 관행 때문에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싶어도 잘되지 않으니 시기와 질투라도 하는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예수께서 '참으로 하느님께 속한 분'이라면 적어도 세리와 죄인들과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일까?

 예수님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보면서 우리 시대 교회의 두 가지 모습을 떠올려본다. 예수님을 통해 원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는 죄인을 불러모아야 할 뿐 아니라 제 발로 찾아오는 죄인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풍성한 '밥상공동체'를 이루는 따스한 희망이신 분, 교회의 몸이신 분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을 통해서는 딱딱하게 권위적이며 사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고,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디찬 벽돌로 변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되는 교회 모습을 떠올린다. 이는 '교회의 몸이신 분'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음식을 먹고 나누는 밥상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인다.

 사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그 몸이시고 머리이신 분을 닮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도리다. 돈맛을 알고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세리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분'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두말없이 받아들이고 음식을 나눴다. 과연 우리 시대의 교회도 그분처럼 따스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우리 시대의 교회 참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교회의 참모습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명쾌하게 가르쳐주신다. 그 중심 내용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아버지의 인내와 관용과 포용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를 욕하거나 등져서 떠난 이들이 다시금 교회를 찾는 것은 아버지를 떠난 작은아들이 되돌아오는 것과 같다.

 작은아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하고 자기 죄를 고백한다. 하지만 큰아들은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하며 아버지께 화를 내고 대든다.

 큰아들은 이럴 때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오늘날 큰아들 모습은 경직된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교회가, 교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큰아들처럼 경직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어느 누가 교회를 통해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깨닫겠는가.

 우리 시대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께서 보내신 아드님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께 속한 공동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 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