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 신부 (수원교구 단내성가정성지 전담)
"미안하지만 이번 성체거동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취소합니다."
이천지구 순교자 현양대회 겸 단내성가정성지 선포 25주년 행사로 기획한 성체거동 도보순례를 엿새 앞둔 날 지구 사제회의 결정 사항을 알리는 지구장 신부님 전화였습니다.
1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허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기 싫어하시는 것일까요? 성체거동이 비 때문에 취소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걷고 싶어하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뜻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래. 가정 성화를 위한 성체거동이다!' 문득 우리 성지가 성가정성지라는 것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취소된 이천지구 순교자 현양대회 및 성체거동은 '단내성가정성지 제1회 가정성화를 위한 성체거동 도보순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홍보가 문제였습니다. 새로 잡은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리지 않으면 올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홍보는 다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수원교구 각 본당에 포스터를 보내고, 신문과 주보에 광고를 내고 홍보 소책자도 만들어 돌렸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5000명을 먹이신 예수님처럼 성체거동 도보순례 참여 신자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문의 전화 횟수를 보니 150명 정도는 올 것 같았습니다. 음식이 남더라도 여유 있게 준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300명 분 식사를 주문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20명도 안 오면 어떻게 하지?'
불안한 마음은 하루 전날 극에 달했습니다. 오전부터 밤늦도록 하늘이 흑백사진처럼 어두웠습니다. 하늘은 엄청난 비를 퍼부었습니다. 이렇게 온종일 비가 쏟아진다면 오려고 했던 사람도 안 올 거 같았습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습니다. 준비가 잘 됐는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출발지인 어농성지를 향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차창 밖을 보는데 이런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네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준비시킨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편해지면서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찬미하여라! 오 나의 영혼아. 찬미하여라! 주 나의 하느님!" 시작예식을 마치자 어농성지에 떼제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1년여를 준비한 성체거동 도보순례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몇 명이나 참가했을까요? 20명? 150명? 아니면 300명? 아니었습니다. 무려 신자 600여 명이 자발적으로 오셨습니다. 긴 성체거동 행렬이 논길과 둑길을 따라 이어졌습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의 뒤를 따른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성지는 10월 마지막 주일에 제2회 가정성화를 위한 성체거동 도보순례를 개최합니다. 거룩한 축제에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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