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 현장

떠나고 싶었던 곳

namsarang 2013. 11. 4. 11:02

[사도직 현장에서]

떠나고 싶었던 곳

황영화 신부 (안동교구 춘양본당 주임)


   얼마 전 성체를 모시고 혼자 사시는 마르타 할머니를 찾아뵀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린 것도 아닌데, 그날은 나름으로 청소가 돼 있었습니다. 먹다 남은 음식 냄비도, 곰팡이 냄새나는 이부자리도 치워져 있었고, 다 해진 가톨릭 기도서와 오래된 묵주도 차분하고도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지요. 할머니가 거동하시기에 많이 좋아지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외로이 지켜온 컴컴한 방을 스스로 밝힌 최고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좋은 나라로 가셨습니다. 한 많은 인생살이, 이제는 그분과 더불어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저에게 이곳은 부임하는 순간부터 '떠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공소에서 본당이 돼 준비된 것이 없는 터라 막막하기 그지없었지요. 성당은 풀이 난 마당에 약초를 말리던 창고 건물이었습니다. 사제관은 성당에서 시골길 따라 5분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책상 하나 놓을 곳 없는 흙집 단칸방이었습니다. 선교지라 생각하고 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방에서 나는 눅눅한 곰팡내는 아무리 보일러를 올려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기댈 곳은 밥상이었습니다. 턱을 괼 수 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사제로서 살면서 어느 정도의 안정과 이해받음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머리는 그게 아니었지만, 습관처럼 '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방에서 혼자 임종을 맞이하신 마르타 할머니처럼 천방둑에 마리아 할머니가, 산지골에 데레사 할머니가 지금도 그렇게 홀로 계십니다.

 기찻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허리 아픈 아우구스티노씨는 자식이 며느릿감을 데리고 왔는데 쓰러져 가는 집을 보고 도망을 쳤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철수와 순이는 눈이 사시라서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있습니다. 다 닳아 무너진 싱크대에 수돗물이 안 나와도 괜찮다며 웃는 리나씨는 아이들 방에 책상 하나 없고, 9남매를 무탈하게 키워낸 논밭에 감사하다며 미카엘씨는 오늘도 아홉 개의 손가락으로 곡괭이를 잡아 듭니다. 위로받고 이해받아야 할 이런 분들 앞에서 사제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해 섭섭하다 여겼던 마음이 얼마나 작아 보이던지요.

 신자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지내온 3년. 떠나고 싶었던 이곳에서 만난 구릿빛 얼굴들, 몇 겹으로 눌러 내린 주름살, 거친 손등…. 이제는 그 속에서 굳건한 희망과 믿음, 살아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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