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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 갇혀 다툴 건가, 딛고 일어설 건가

namsarang 2014. 5. 3. 21:00

 

입력 : 2014.05.03 07:19

 

 

日, 공산 혁명가 인질 사건 겪고 列島 개조론 펼쳐 5년 후 G7 진입
美, 기술·안전 낙후 드러낸 참사… 타이태닉 후 허점 메워가며 성장
세월호는 '未來 한국' 가를 계기 修理·投資 않고 남 탓만 해서야

송희영 주필
           송희영 주필
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는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일으킨 주역이다. 그들에게 몹시 큰 충격을 준 사건 가운데 하나가 아사마 산장(山莊) 인질극이다. 그건 전쟁터였다. 일본 공산주의 테러 집단(연합적군파) 소속 5명이 고급 휴양지 가루이자와 아사마 산장에서 관리인 등을 인질로 잡고 219시간 동안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1972년 2월이었다.

열흘간의 총격전은 막 보급된 컬러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시청률이 최고 98.2%를 찍었다. 1억 일본인 거의 전원이 화면 앞에 있었다는 말이다. 범인들은 체포됐지만 3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다. 소니가 세계에서 최첨단 TV를 내놓고, 일본 1인당 GDP(구매력 기준)는 1만1434달러로 벌써 유럽 선진국 평균치를 앞지르던 시절이었다.

어느 일본인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잘사는 나라가 됐는데 왜 공산혁명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무장 인질극을 일으켰는지, 그런 의문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질범들이 체포된 후 그들이 배신자 동료를 12명이나 살해한 것을 보며 일본인들은 또 한 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본인들 마음속에 감춰진 야만성을 탄식하는 글이 쏟아졌다. 자기 비하(卑下)가 지식인 사회의 유행이었다.

미국도 강한 나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똑같은 대형 쇼크를 겪는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하던 1912년 무렵 미국의 1인당 GDP는 5300달러 수준으로 영국보다 높았다. 그러나 미국 JP모건이 거느린 해운 회사는 영국의 경쟁 회사를 이기지 못했다. 대형 여객선을 건조할 기술도 없었다. 존 피어폰트 모건 회장은 영국의 경쟁 상대를 누르기 위해 타이태닉 건조를 영국에 발주하고 선박 운영도 영국인들에게 맡겼다.

우리에게 타이태닉은 영웅적인 선장(船長)과 애틋하게 꾸며진 러브스토리로 포장돼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얘기는 세월호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구명보트 숫자는 적었다. 짙은 안개를 뚫고 나간 세월호처럼 타이태닉도 빙하 출현 경고를 무시하고 출항을 강행했다. 선장은 처녀 항해를 기념하려는 듯 경고를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망루에는 주변을 감시할 망원경 하나 없었다. 타이태닉의 복원력과 설계 구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출항 전 보험 가입을 거부한 보험사도 있었다.

희생자는 1513명이었다. 모건 회장은 승객의 안전을 무시하면서도 자기 전용 객실에 무도회장을 따로 만들고 전용 담배 보관함까지 설치했다. 이런 호사(豪奢)에 대한 비난이 빗발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모건그룹 전체가 도마 위에 올랐다. 모건 회장은 국회 청문회에 끌려나가 짓궂은 봉변을 당해야 했다.

아사마 산장 사건을 전후해 일본은 '경제동물(Economic animal)'이라는 경멸이 국제사회에서 퍼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가이드 깃발을 따라 루브르박물관을 단체 관광하는 풍경은 유럽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아사마의 충격 이후 다섯 달 만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라는 정치인이 '일본 열도 개조론'을 들고나와 정권을 잡았다. 부동산 값은 뛰었지만 다나카의 솔직성, 불도저처럼 정책을 밀고 나가는 실행력에 온 국민이 열광했다. 소니는 워크맨을 개발했고, 도요타자동차는 GM과 합작 공장을 세웠다. 안에서 서로 다투기보다는 세계로 나간 것이다. 5년 후 일본은 강대국(强大國)들의 모임인 G7 회담에 동양의 대표 선수로 참석했다. 일본인들은 아사마 사건에서 맛본 모멸감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타이태닉의 충격에 빠졌던 시절 미국에는 중앙은행(FRB)도 없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매기는 상속·증여세도 없던 미완성(未完成) 국가였다. 그 당시 미국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못하다며 미국인 스스로를 깔보는 인식이 수많은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흥 부자들은 파티에서 서로 프랑스어 실력을 과시하느라 안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가를 완성해가는 길에서 불쑥불쑥 떠오르는 허점을 메우고 경제력을 키우며 그런 장벽을 뛰어넘었다. 타이태닉의 상처도 인간 중시의 시민의식이 싹트면서 그렇게 아물어갔다.

세월호 참변이나 서울 지하철 사고는 국제 경쟁에 노출되지 못한 부문에서 발생했다. 두 회사 모두 국내 시장에서만 사업을 해온 우물 안 촌뜨기 회사들이고, 사고 관련자들도 대부분 나라 밖에서 외국 경쟁자와 싸워본 적이 없는 내수형(內需型) 인간들이다. 우리가 K팝, 갤럭시폰을 자랑하며 이만하면 국제화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라 구석구석에는 이처럼 뒤처진 분야가 적지 않다.

잇단 사고를 겪으며 우리의 안전 불감증을 한탄할 수도 있고, 모든 비극은 네 탓이라고 남에게 손가락질하며 서로 다툴 수도 있다. 고장 난 곳을 고치고 뒤진 곳에 더 투자해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충격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나라가 될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