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루카 2,1-14)
|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
사벌퇴강성당이 있는 마을은 해가 지면 무척 어둡습니다. 가로등이 있지만 어둠을 밝히기에는 충분하지 못해서 저녁 미사에 참례하는 어르신들은 손전등을 들고 성당에 오십니다. 손전등을 보면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페루에서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2007년이었습니다. 페루 생활 2년을 넘어서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동료 선교 사제와 함께 해발 4000m 고지 마을을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내친김에 6768m 높이의 우아스까란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첫날은 괜찮았지만 둘째 날부터 호흡이 힘들어졌습니다. 고산병 증세인 두통과 고열이 왔고, 입술은 보라색으로 변했습니다. 특히 달콤한 휴식을 취해야 할 밤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없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10시간 동안 경험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정말 무섭고 두렵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숨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렸습니다. 완전한 어둠이었습니다. 그런 고통과 두려움의 터널을 지난 후 만난 아침 햇살은 정말 말할 수 없는 기쁨,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살면서 빛의 소중함을 체험한 적이 여러 번 있지만 가장 강렬한 체험은 바로 그 산속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저와 같은 나약한 존재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은 빛을 통해 암흑의 공포에서 환희로,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어둠은 부정부패, 무질서, 무지, 질병, 배고픔, 거짓, 추함을 의미합니다. 스페인 왕이었던 펠리페 2세(1527~1598)는 “내 영토에서 가톨릭 이외의 종교란 있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의 이름으로 수만 명의 사람을 죽인 그는 타인의 생각을 지배하려는 유혹에 빠져 가장 대표적인 ‘어둠의 인물’이 됐습니다. 빛은 생명과 사랑, 기쁨과 열의, 존경과 평화를 뜻합니다. 빛 덕분에 우리는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또한 계절의 변화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하루하루를 기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집이 아닌 동물의 집에서 태어나 그들의 밥그릇에 누워 계셨습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인간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통해 약한 이들도 하느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인간임을 알게 됐고, 가난이나 질병이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새로운 도약이라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페루 리마에서의 성탄 대축일이 생각납니다. 12월이면 신자들은 무더위와 물 부족, 온갖 악취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성탄 밤 미사만큼은 축제의 시간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도 그 날만큼은 서로 작은 선물을 주고받고 파네톤이라는 빵과 초코우유를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 성탄 음악을 들으면서 빛의 축제에 참가합니다. 이튿날에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이나 부모ㆍ형제를 찾아갑니다.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빛의 축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제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성탄이 기억납니다. 14살짜리 페루 여자아이가 찾아와 “한 살짜리 아들의 생일이 성탄 대축일”이라며 꼭 와달라고 초대했습니다. 집을 찾아가보니 소녀의 어머니, 할머니도 미혼모였습니다. 소녀의 할머니와 제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하지만 정성스럽게 증손자를 축하해 주는 모습에서 한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보았고, 소박한 성탄절 음식을 나누며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세상의 남자들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할 수도 있는 이들이지만 또 다른 남자(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서로 축복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빛 축제’ 자체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밤늦도록 춤을 추고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아이의 세례 대부도 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용서, 평화로운 삶이 저를 그 가족의 구성원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정말로 황홀하고 기쁜 빛의 축제였습니다. 지난해 한국에 돌아온 후 첫 성탄을 맞았습니다. 할머니들의 거친 손이 이웃을 위해 내미는 손이 되고, 이웃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동동 구루무’(화장품)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올해는 맛있는 떡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소중하게 준비한 음식을 서로 나누며 다른 이에게 감춰져 있는 신비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격려와 용기의 빛을 받아서 종교적ㆍ정치적으로 방황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사막을 잘 건너가기를 기대합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펠리즈 나비다!(스페인어 성탄 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