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우리는 평화의 선포자인가?

namsarang 2015. 4. 12. 14:20

[생활 속의 복음]

우리는 평화의 선포자인가?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이제는 완연한 봄입니다. 농촌 일손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봄에 생명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 오늘 복음을 보면서 “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믿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죽었던 스승이 부활했는데 울음을 터뜨린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20,11),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기잡이 생활로 돌아갔던 제자들(요한 21,3), 실패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향하는 이들을(루카 24,13-35) 보면서 그들이 눈이 멀었거나 귀가 막힌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변화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20,19).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이고 죽음은 죄로 인해 세상에 왔습니다. 죄와 두려움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평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저의 주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두려움과 죄를 극복합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과연 제자들만 두려움에 빠져서 살고 있을까요?

엄청난 국방비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집 문단속을 하는 이유는요? 병원에 자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모두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최초 인류도 두려워서 하느님을 피했으며(창세 3,10), 후손인 우리도 두려움 속에 살게 됐습니다. 저도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10여 년 전 굉장한 두려움에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페루의 시골 산속 해발 3750m 고지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우기에는 거의 매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길은 진흙탕이 됩니다. 길을 걷는 게 너무 위험해 거의 사제관 안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5개월 이상을 갇혀 지내자 ‘이렇게 살아서 뭐하지?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자신을 똑 닮은 자녀들이 있고, 아프면 옆에서 걱정해주고 약도 사다 주는 부인도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인가?’ 하는 허무함도 밀려왔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자 자살 충동까지 일어났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부인과 자식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도 찾아왔습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무의하고 흔적도 없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 나의 삶이고, 사제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물도 나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때가 되면 죽는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고민해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철학과 물리학, 그리고 역사학이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삶에 대한 철저한 묵상과 책에서 배운 인문학의 도움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주어진 삶의 여정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내 행동, 생각, 말 모든 것은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이라는 코드로 정리돼 다음 세대 유전인자로 전달되므로 영원한 죽음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우주 전체적으로 보면 ‘에너지 총량 불변의 법칙’과 ‘상대성 이론’에 의해 에너지와 물질이 서로 전환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현재로 마지막이 아니며 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또 인간은 ‘자유 의지’(마음과 논리)라는 영혼을 통해 진리와 정의, 평화를 추구하며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에너지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과거 4월에는 두려움 때문에 여러 사람을 죽인 이도 있었고,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한 훌륭한 우리의 이웃도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참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의지를 선물로 줍니다.

지난해 4월 16일 많은 사람이 두려움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준비도 없이 공포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손톱이 없는 시신도 많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마음이 아픈 이유는 그들이 공포에 떨었을 순간에 아무런 도움과 위로를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별했습니다.

제삼자인 저도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유가족은 어떠하겠습니까? 정치적인 이해타산, 국가적인 손익 계산이 우선인가요? 아니면 두려움에 죽어간 많은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선물하는 게 먼저일까요? 희생자 입장에서, 유가족의 처지에서 생각하면서 하나씩 우리가 해야 일을 실천해 나갑시다. “주님, 평화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