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신여성의 선구자, 하란사·박에스터·윤정원

namsarang 2017. 1. 14. 13:19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4] 신여성의 선구자, 하란사·박에스터·윤정원  


  •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입력 : 2009.12.24 03:25 | 수정 : 2016.11.22 18:54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23/2009122301530.html


1909. 8. 29.~1910. 8. 29.

'부인 사회와 각 여학교에서 윤정원씨와 박에스터씨와 하란사씨가 외국에서 귀국하여 여자 교육에 종사함과 생명에 근무함을 감복하여 거월(去月) 28일에 서궐(西闕: 경희궁)에서 환영회를 설(設)하고 삼씨를 영접하여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역사를 관하건대 아국 오백여년 부인계에서 외국에 유학하여 문명한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한 미사(美事)라 여자 학업이 종차(從此) 발달됨은 가히 찬하하겠도다.'('황성신문' 1909.5.5.)

1909년 4월 28일 경희궁에서 거행된 '여성 유학생 환영회'에 700~800명의 하객이 운집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미국과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세 여성에게 거는 기대는 그만큼 컸다.

최초의 여성 유학생 박에스터(왼쪽), 하란사(가운데), 윤정원.
최초의 여성 유학생 박에스터(1877 ~1910)의 본명은 김점동이었다. 에스터(Esther: 愛施德)는 세례명이었고, '박'은 남편 박유산의 성이었다. 부친이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의 고용인으로 일한 인연으로, 그녀는 188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의료 선교사 홀(Rosetta Hall) 부인의 통역으로 일했고, 그의 주선으로 1895년 미국 유학을 떠나 이듬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00년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귀국해 보구여관(保救女館: 이화학당에서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과 평양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 의사로 일했다.

하란사(1872~1919)의 본성은 김씨였다. '하'는 남편의 성이었고, 난사(蘭史:Nancy)는 이화학당 입학 후 지은 영어 이름이었다. 이화학당은 기혼자의 입학을 금지했지만, 여러 번 찾아가 사정한 끝에 입학을 허락받았다. 1896년 남편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서 영문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이화학당 교사로 활동했다.

윤정원(1883~?)은 탁지부 주사와 대한자강회 부회장을 지낸 부친 윤효정의 권유로 1898년 일본 유학을 떠나 명치(明治)여학교와 동경음악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공부했다. 일본 영사 아키즈키(秋月左都夫)의 후원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를 돌아보다가 1908년 관립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된 후 교수로 초빙되었다.

세 여성에게 걸었던 사회의 기대와 달리, 그들이 뜻을 펼치기에 시대는 너무 암울했다. 박에스터는 1910년 4월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하란사는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 여성 대표로 참석하려는 계획이 일본 경찰에 알려져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북경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등박문의 양녀로 일본의 간첩이었던 배정자가 하란사를 미행해 북경에서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윤정원은 강제합방 후 한성고녀 교수직을 사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음악과 외국어 개인교수로 생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 광복 이후 북경에서 한국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세 사람은 한국 여성이 활동하지 못했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한 세대 후 등장하는 신여성의 선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