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아브라함의 예
1-8절, 믿음과 행위는 명백히 대조됨
[1-3]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실에 대하여 구약 시대의 인물인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좀더 설명한다. 여기 인용된 구약 성경은 창세기 15:6의 말씀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 성경에서 이미 증거되어 있었다.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항상 질문하고 대답해야 하며, 성경에 계시된 진리대로 믿고 살아야 한다. 신앙 생활의 법칙은 교회의 전통적 교리나 사람들의 교훈이 아니고 오직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 교훈대로 믿고 성경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성경을 이탈하면 이단이 된다.
[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가리키며, '빚'이라는 말은 '당연한 것' 즉 당연히 주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대조되고 구별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의로운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근본적으로 행위와 구별되는 것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선하고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행위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고 구원을 받을 만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구속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행위와 구별되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율법의 행위와 별개로 얻은 의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이다.
[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일한 것이 없이'라는 원어(코리스 에르곤)는 '행위들과 별개로'라는 뜻이다.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다윗도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증거했음을 말한다. 사람은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의 사함과 가리움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칭의는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9-17절, 믿음의 의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똑같이 적용됨
[9, 10]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은 언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이 나오고, 창세기 16장에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한다. 창세기 17장에는 할례에 대한 언약이 나오고, 17:24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적어도 13년 전, 즉 그가 할례 받기 전이었다.
[11-13]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의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12절에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라는 말은 '할례 받을 뿐 아니라'로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육신적 할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4-16]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의 역할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16절의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라는 말은 '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대조된다. 그것들이 서로 모순되도록 대립되는 것은 아니나 서로 혼동되지 않도록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의롭게 행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행위와 구별된다.
17-25절,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
[17, 18]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참된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즉 그는 부활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믿음은 믿는 자신의 무엇을 바라며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음의 대상만을 바라며 의존한다. 성도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모든 생물들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직역하면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인데, 그것은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인간적 소망은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던 것이다.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 이것이 참 믿음의 성격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을 때 혹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이다. 그러나 참 믿음은 하나님을 그저 믿는 것이다.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늙었으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어느덧 나이가 백세가 되어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잘 알았으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20, 21]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불신앙은 요동하고 비틀거리는 생각과 마음이다. '의심하다'는 원어는 '요동하다, 비틀거리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앙은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것은 자신을 의지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음을 확신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 이 믿음은 결코 인간의 무엇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믿음이었다. 믿음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에게도 구원은 똑같은 원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들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모든 내용을 믿을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순히 전능의 하나님, 부활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옛날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서도 증거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믿음과 행위는 명백히 대조된다. 믿음은 그저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부활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의지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자!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을 믿자.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자. 그것이 진정한 구원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