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서필·서희·서눌 3代가 줄줄이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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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徐弼·901년~965년)은 고려 초 광종 때 인물로 하급 관리에서 출발해 정승에 해당하는 내의령(內議令·종1품)에까지 오른 특이한 인물이다. 고려나 조선 때 문과를 거치지 않고 정승까지 오른 인물들은 대부분 무신으로서 정변이나 정란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서필의 관직 이력은 참으로 특이했다. 그만큼 서필은 관리로서의 이재(吏才)와 청렴강직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광종이 당시 재상으로 있던 왕함민, 황보광겸, 서필 세 사람에게 금으로 된 술잔을 내리자 서필만이 받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하가 금 그릇을 사용하면 임금은 무슨 그릇을 써야 하겠습니까?" 아부라기보다는 사치에 대한 경계였다. 광종은 감동했다. "그대는 보물을 보물로 여기지 않으나 나는 그대의 말을 보물로 여기겠다."
서필에게는 서렴, 서희, 서영 세 아들이 있었다. 둘째 서희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942년~998년)다. 서희도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엄정하고 성실'했다. 광종 11년(9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서희는 문무(文武) 양면에서 능력을 보이며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12년(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침입해오자 서희는 중군사가 되어 평안도 방어를 책임지게 된다.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는 여진족들이 들어와 사는 바람에 딱히 누구의 땅이라고 하기 애매한 상황이었고 소손녕은 서경(평양)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고려 조정은 공포에 떨었다. 항복을 하거나 서경 이북 땅을 거란에 넘겨주자는 절망적 의견에 성종도 솔깃해 할 때 서희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서희는 소손녕이 보내온 항복요구 문서를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성종을 설득했다. 더불어 겉으로는 거란이 강대한 것 같으나 실은 고려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정확히 읽어냈다.
거란군과의 담판을 위해 서희는 직접 소손녕을 만나겠다고 자원한다. 국서를 들고 적진에 들어간 서희는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는 소손녕의 위압적인 요구를 거부했다.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라면 모르겠지만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서희의 비범함을 인정한 소손녕은 그때부터 예(禮)로써 대우했다. 이어 두 사람 사이에 고구려 논쟁이 벌어진다. 소손녕은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자기 땅(평안북도)에 침범했느냐고 따졌고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의 후계자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수도의 하나로 삼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소손녕은 본심을 드러낸다. 왜 자신들과 국경이 접해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서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서희가 말한 거란의 두려움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와 맞서야 하는 거란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고려와는 화친을 맺어둬야 송나라와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희는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강점하고 있는 여진에 책임을 돌렸다. 여진이 막고 있으니 거란과 통하기 어렵고 그러니 고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송나라와 통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소손녕은 거란 임금과 논의 끝에 철군을 결정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서희는 여진을 소탕한 후에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했다. 이후 서희는 직접 군사를 끌고 가서 여진들을 몰아내고 성종 13년에는 곽추 구주, 성종 14년에는 안의, 흥화, 성종 15년에는 선주 맹주 등 여섯 고을에 성을 쌓고 장흥 귀화 등에는 진(鎭)을 설치해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했다. 빼어난 지략으로 이뤄낸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전형이었다. 이런 공으로 서희는 내사령(內史令·내의령이 바뀐 이름)에 오른다. 부자정승(父子政丞)이 탄생한 것이다.
서희의 아들 서눌(徐訥·?~1042년)도 문과에 장원 급제해 관직의 길에 들어선다. 특히 그의 딸이 1022년(현종 13년) 현종비(원목왕후)가 되면서 훗날 서눌은 문하시중(영의정)에까지 오른다. 3대가 연이어 정승에 올라 이주(利州·경기도 이천) 서씨는 고려의 대표적 명문가 반열에 들게 된다. 이와 관련해 '고려사'는 서필의 아버지 신일(神逸)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적어놓고 있다.
시골생활을 하던 신일은 어느 날 사슴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사슴의 몸에는 화살이 꽂혀 있어 그것을 빼주고 집안에 숨겨주었다. 잠시 후 사냥꾼이 달려왔지만 모르는 척 돌려보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사슴은 나의 아들이었는데 그대 덕택에 목숨을 구했다. 앞으로 당신 자손들은 대대로 경(卿)이나 상(相)의 높은 벼슬을 하게 되리라"고 말했다. 게다가 신일이 서필을 낳았을 때 그의 나이 80이었다고 한다.
귀신 이야기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유학자들이 쓴 '고려사'에 이런 신이(神異)한 이야기가 실린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사실이어서라기보다는 조상의 음덕(陰德)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먼 훗날 서희의 현손(玄孫) 서공(徐恭)도 의종 때 평장사(종2품)라는 고위직에 오르는데 그 자신 문신이면서도 평소에 문신들의 교만을 미워하고 무신들을 공경하게 대하는 겸손한 처신을 보여 무신란 때 정중부가 오히려 수비대 22명을 보내 그를 지켜주었다. 조상의 음덕과 본인의 겸양이 만나면 죽을 목숨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광종이 당시 재상으로 있던 왕함민, 황보광겸, 서필 세 사람에게 금으로 된 술잔을 내리자 서필만이 받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하가 금 그릇을 사용하면 임금은 무슨 그릇을 써야 하겠습니까?" 아부라기보다는 사치에 대한 경계였다. 광종은 감동했다. "그대는 보물을 보물로 여기지 않으나 나는 그대의 말을 보물로 여기겠다."
서필에게는 서렴, 서희, 서영 세 아들이 있었다. 둘째 서희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942년~998년)다. 서희도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엄정하고 성실'했다. 광종 11년(9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서희는 문무(文武) 양면에서 능력을 보이며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12년(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침입해오자 서희는 중군사가 되어 평안도 방어를 책임지게 된다.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는 여진족들이 들어와 사는 바람에 딱히 누구의 땅이라고 하기 애매한 상황이었고 소손녕은 서경(평양)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고려 조정은 공포에 떨었다. 항복을 하거나 서경 이북 땅을 거란에 넘겨주자는 절망적 의견에 성종도 솔깃해 할 때 서희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서희는 소손녕이 보내온 항복요구 문서를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성종을 설득했다. 더불어 겉으로는 거란이 강대한 것 같으나 실은 고려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정확히 읽어냈다.
거란군과의 담판을 위해 서희는 직접 소손녕을 만나겠다고 자원한다. 국서를 들고 적진에 들어간 서희는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는 소손녕의 위압적인 요구를 거부했다.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라면 모르겠지만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서희의 비범함을 인정한 소손녕은 그때부터 예(禮)로써 대우했다. 이어 두 사람 사이에 고구려 논쟁이 벌어진다. 소손녕은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자기 땅(평안북도)에 침범했느냐고 따졌고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의 후계자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수도의 하나로 삼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소손녕은 본심을 드러낸다. 왜 자신들과 국경이 접해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서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서희가 말한 거란의 두려움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와 맞서야 하는 거란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고려와는 화친을 맺어둬야 송나라와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희는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강점하고 있는 여진에 책임을 돌렸다. 여진이 막고 있으니 거란과 통하기 어렵고 그러니 고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송나라와 통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소손녕은 거란 임금과 논의 끝에 철군을 결정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서희는 여진을 소탕한 후에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했다. 이후 서희는 직접 군사를 끌고 가서 여진들을 몰아내고 성종 13년에는 곽추 구주, 성종 14년에는 안의, 흥화, 성종 15년에는 선주 맹주 등 여섯 고을에 성을 쌓고 장흥 귀화 등에는 진(鎭)을 설치해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했다. 빼어난 지략으로 이뤄낸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전형이었다. 이런 공으로 서희는 내사령(內史令·내의령이 바뀐 이름)에 오른다. 부자정승(父子政丞)이 탄생한 것이다.
서희의 아들 서눌(徐訥·?~1042년)도 문과에 장원 급제해 관직의 길에 들어선다. 특히 그의 딸이 1022년(현종 13년) 현종비(원목왕후)가 되면서 훗날 서눌은 문하시중(영의정)에까지 오른다. 3대가 연이어 정승에 올라 이주(利州·경기도 이천) 서씨는 고려의 대표적 명문가 반열에 들게 된다. 이와 관련해 '고려사'는 서필의 아버지 신일(神逸)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적어놓고 있다.
시골생활을 하던 신일은 어느 날 사슴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사슴의 몸에는 화살이 꽂혀 있어 그것을 빼주고 집안에 숨겨주었다. 잠시 후 사냥꾼이 달려왔지만 모르는 척 돌려보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사슴은 나의 아들이었는데 그대 덕택에 목숨을 구했다. 앞으로 당신 자손들은 대대로 경(卿)이나 상(相)의 높은 벼슬을 하게 되리라"고 말했다. 게다가 신일이 서필을 낳았을 때 그의 나이 80이었다고 한다.
귀신 이야기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유학자들이 쓴 '고려사'에 이런 신이(神異)한 이야기가 실린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사실이어서라기보다는 조상의 음덕(陰德)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먼 훗날 서희의 현손(玄孫) 서공(徐恭)도 의종 때 평장사(종2품)라는 고위직에 오르는데 그 자신 문신이면서도 평소에 문신들의 교만을 미워하고 무신들을 공경하게 대하는 겸손한 처신을 보여 무신란 때 정중부가 오히려 수비대 22명을 보내 그를 지켜주었다. 조상의 음덕과 본인의 겸양이 만나면 죽을 목숨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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