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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한국전쟁

namsarang 2009. 5. 27. 14:01

[만물상] 잊혀진 한국전쟁

                                                                                                                                                            - 김동섭 논설위원 - 

 

1951년 4월25일 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셔부대가 사흘 전 시작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일곱 차례나 격퇴하고 나서 대대장 카네 중령은 말했다. "각자 알아서 후퇴하라. 나는 부상자들과 남겠다." 중공군 4만여명과 맞서 싸운 이 전투에서 영국군 50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56명만이 탈출했다.

▶설마리 격전을 비롯한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은 1개 여단 4000명 병력으로 중공군 4만명에 맞서 나흘을 용맹하게 버티면서 서울로 진격하던 중공군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군 전사자 1100명 대부분이 임진강 전투에서 숨졌다. 생존한 참전용사 50여명은 지금도 런던에 있는 선술집 '임진 퍼브(Pub)'에서 모이고 일부는 해마다 4월이면 파주에 있는 설마리 전적기념비를 찾는다.

▶6·25 참전국들은 피흘려 싸운 전쟁을 잊지 않는다. 캐나다는 작년에 가평 전투를 3부작 TV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필리핀도 재작년에 다큐를 방영했다. 미국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근접전투와 백병전으로 맞섰던 양평 지평리 전투를 지금도 육군 전투교재로 쓴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외곽순환도로 이름은 '한국전 기념 고속도로'이고 호주 사관학교 건물 이름은 '가평'이다. 캐나다 위니펙의 부대는 '캠프 가평'이다.

 
▶한국전쟁에서 16개국 유엔군 4만여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부산 유엔묘지와 경기도 지역 전적비쯤이다. 유엔묘지 1만1000명의 유해 대부분은 본국으로 옮겨갔고 영국군 885명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 전사자들이 남아 있다. 숨진 곳에 묻는 영국 풍속에 따른 것이다. 영국·뉴질랜드·호주의 참전 부대들은 지금도 가평·포천 등 전적비가 있는 지역 학교들에 장학금을 대준다.

▶더타임스 기자 등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영국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마지막 총알(To the Last Round)'이라는 책을 영국에서 펴냈다. 임진강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 50여명을 2년 동안 만나 쓴 한국전쟁 논픽션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2차대전과 베트남전 틈바구니에서 잊혀져 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나보다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가 먼저 참전군인들 이야기를 발굴해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낯이 뜨겁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세계 속에 잊혀진 전쟁으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