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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그는 대한독립의 방아쇠를 당겼다

namsarang 2009. 5. 30. 21:29

[안중근 서거 99년, 의거 100년]

100년 전… 그는 대한독립의 방아쇠를 당겼다

오늘은 안중근 義士가 32세로 순국한 날
"동양 평화를 염원한 독립투사이자 經世家"
                                                                                   = 김호일(안중근의사 기념관장) =
 

▲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 당시의 안중근.
3월 26일은 1910년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장군이 일본제국주의의 적장을 사살하고 붙잡혀 적진에서 재판을 받고 순국(殉國)한 지 99주년인 날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동북아 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높아가던 때였다. 동양 3국 중 일본은 재빨리 메이지유신을 거쳐 서구화로 무장해 대륙 침탈에 발 벗고 나서 대한제국을 첫 희생자로 삼았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했고, 대한제국은 그 지배 아래 놓인 것이다.

애천(愛天), 애인(愛人), 애국(愛國)의 정신으로 무장한 안중근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을 몸소 실천한 애국투사였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외쳤다.

오늘의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안중근이 32세의 일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얼마나 고난의 역정을 거쳤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의병장이었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인 군사지휘관이었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또 삼흥(三興)·돈의(敦義)학교 교장으로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고, 국채보상운동을 실천한 경제인이었으며, 동양평화론을 제창한 경세인(經世人)이기도 했다. 이처럼 안중근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를 희생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독립을 성취하려고 한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의 독립과 함께 동양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의 의거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였음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안중근은 이미 100년 전 지금 논의가 활발한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상한 사상가이자 그 구체적인 실천방략까지 고민한 인물인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민족적 과제를, 안중근은 99년 전 적지의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감방에서 남긴 글과 서예로, 법정 진술로 웅변하고 있다. 안중근이 생각하고 실천한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한 의사의 염원을 다시 떠올린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인 1910년 3월 8일 정근·공근 두 아우와 프랑스인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최후 유언을 하는 장면.
▲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를 실은 마차가 형장으로 가는 장면.

첨단 영상으로 '히로부미 저격 장면' 생생하게 재연

미리 본 '새 기념관'
                                                                                                           - 안용현 기자 -
 
중국 하얼빈역에서 국권 찬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새 기념관 공사가 첫 삽을 뜬다.

안중근의사 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장 박유철)는 안 의사 순국 99주기인 26일 서울 남산공원 건립부지(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471 외 1필지)에서 광복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 기념관 기공식을 갖는다고 25일 밝혔다. 사업비는 모두 150억여원으로 내년 상반기 완공될 예정이다.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박유철 위원장은 "현재의 안 의사 기념관은 38년 전에 지어져 굉장히 협소하고 낡아 박정희 전 대통령도 새로 짓도록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도 2004년 8월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현재 기념관을 방문한 뒤 신축을 검토했었다"고 말했다. 실제 현재의 기념관은 한번에 30여명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기념관 관계자는 "구멍가게 수준"이라며 "학생들이 단체로 오면 수용하기 힘들다"고 했다.
▲ 안중근 의사의 새 기념관 조감도.
다행히 새 기념관은 대지 5772.7㎡(1764평), 연면적 3799㎡(1149평),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로 지어진다. 연면적 기준으로 현재 기념관보다 6배쯤 넓다. 전시실, 참배홀, 집회실 등이 마련되며 안 의사 관련 학술회의와 기념식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전시 품목도 다양해진다. 안 의사 사진과 안 의사가 생전에 남긴 글씨(유묵), 안 의사의 혈서(血書) 엽서, 안 의사가 보낸 편지, 안 의사 재판 관련 신문기사, 안 의사 가족 사진 등 안 의사 관련 유품을 모두 모았다. 안 의사가 의거 당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권총과 여순감옥 사형실 사진도 전시한다. 첨단 영상시스템을 이용해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재연했고, 재판 과정에서 일제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모습도 되살렸다. 안 의사가 설파한 '동양평화론'에 대한 영상 설명도 시청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 숭모회(이사장 안응모)는 1959년 만들어져 낡을 대로 낡은 안 의사 동상도 새로 세울 계획이다.

국가보훈처 신현재 대변인은 "신축하는 기념관은 안 의사의 애국애족과 위국헌신의 정신을 민족의 정체성으로 승화·실천하고 국민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선양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서 온 국민의 기념관으로 새롭게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건립식에는 일본에서 안 의사 숭모사업을 전개해온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호세이(法政)대 대학원 교수 등 일본측 추모단 15명과 중국의 장셴윈(蔣賢云) 안중근 의사 하얼빈숭모지회장 등 5명도 참석한다.

 

기념관' 기금 22억 모자라… 국민성금 모금 본격 착수

                                                                               - 김민철 기자 -
 

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장 박유철)는 26일 안중근의사기념관 기공식을 계기로 본격적인 국민성금 모금에 착수하기로 했다.

건립위원회는 우선 모금운동을 알리는 리플릿 20만장을 찍어 희망하는 전국 은행과 단체 등에 배포해 분위기를 고조시킬 방침이다.

건립위원회는 기념관 신축을 위한 정부 지원 예산 130억원을 확보했지만 부족한 재원(財源) 3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국민성금을 모으고 있다. 박유철 위원장은 "국민 여러분들이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심정으로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현재까지 2800여명의 정성이 모여 7억8000만원이 쌓였다. 단국대(총장 장호성) 교직원과 학생들, 순흥 안씨 대종회 2파(회장 안영홍), 금호아시아나그룹(회장 박삼구), 재단법인 불이원(이사장 김명자), 진주 봉원중 학생들과 교사, 국민은행, 우리은행 종로4가 지점 등에서 성금을 기탁했다. 또 안 의사를 존경한다는 일본인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호세이(法政)대 교수, 고마쓰 아키오(小松昭夫)씨도 각각 성금을 전달했다.
한국청년회의소(JC·중앙회장 주지홍)는 회원 2만명이 참여해 다음 달부터 안 의사 기념관 건립 모금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JC는 전국에서 기념관 건립모금 리플릿, 안 의사가 남긴 유묵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을 사용한 책갈피를 나누어 주며 모금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주지홍 JC중앙회장은 "32세의 나이로 순국한 '청년 안중근'의 뜻과 사상이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을 슬로건으로 활동 중인 JC의 이념과 잘 맞는다"며 "JC회원들이 안 의사 기념관 건립 모금운동을 하며 의사의 민족정신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금 모금에 참여하려면…

계좌번호 (예금주: 사단법인 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

우리은행 1005-980-222555, 하나은행 212-222224-22205, 기업은행 002-056000-04-014, 신한은행 140-007-119219, 농협 027-01-511501, 우체국 010793-01-006372, 국민은행 008601-04-024409, 제일은행 125-20-130665, 외환은행 630-005454-611
 [만물상] 안중근의 글씨

 =김태익 논설위원=

 

1910년 3월 25일 정오 중국 뤼순감옥 3동 9호의 문이 열렸다. 안중근은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3월 25일 형(刑)을 집행하라고 요구했었다. 나와보니 뜻밖에 정근, 공근 두 아우가 면회를 와 있었다. 그는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뼈를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며 "혹 시베리아에 가거들랑 내가 단지(斷指)동맹 때 자른 손가락을 돌려받으라"고 당부했다.


▶사형은 이튿날 집행됐다. 25일은 대한제국 순종황제 생일이기도 해서 안 의사 사형집행이 한국인을 자극할 수 있다고 계산한 일제가 하루 늦춘 것이었다. 하얼빈 의거 때 안 의사를 호송한 일본인 간수가 그에게 마지막 글씨를 부탁했다. 형장으로 떠나기 한 시간 전 그는 하얀 한복을 입고 써내려 갔다. "爲國獻身 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

▶뤼순감옥에 갇혀 있던 143일 동안 안 의사는 200점 넘는 유묵(遺墨)을 남겼다. 그의 기개와 인품에 감화된 일인 검사·간수·의사들이 앞다퉈 글씨를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見利思義 見危授命(이익을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그는 조국 광복을 다짐하며 손가락 하나를 자른 왼손바닥을 도장(手印)처럼 눌렀다.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는 최근 저서 '필적은 말한다'에서 "글씨는 뇌(腦)의 지문"이라고 했다. 글씨만 보고 항일투사인지 친일파인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항일투사 글씨는 정사각형으로 반듯하며 힘찬 것이 많다. 행 간격이 넓고 규칙적이다. 친일파 글씨체는 길고 유연하지만 행 간격이 좁고 불규칙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는 겉으론 호기롭지만 내면에 남모르는 불안감이 서려있다고 했다. 안 의사 글씨는 웅건 장중해 큰 바위에 올라 굵은 발톱으로 굳건하게 서있는 수사자의 서릿발같은 기상을 보여준다.

▶안 의사의 글씨는 한 점에 4억~5억원을 호가한다. 추사, 한석봉 같은 어떤 명필의 글씨보다 높다. 그의 의로운 정신이 담긴 글씨를 한낱 돈으로 계산한다는 게 속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다산이나 율곡 역시 서예가는 아니지만 글씨가 높은 대우를 받는 걸 보면 사람들은 글씨에 담긴 인간도 보는 모양이다. 오늘은 안중근 의사 순국 99년이 되는 날, 그의 뼈는 아직 이국에 있지만 그의 글씨에 담긴 혼은 후세인의 가슴에 얼음처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