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계실 때 잘 합시다

namsarang 2009. 7. 23. 23:18

[사목일기]

계실 때 잘 합시다

                                                                                                                      김귀웅 신부(제주교구 서귀포본당 주임)

신창성당에 부임한 며칠 뒤, 매일 새벽 다섯 시 공소에 모여 54일 기도를 드리던 분들과 함께 기도 마침을 기념해 유명한 송악산 형제섬의 일출을 보러 갔다. 그런데 60년 넘게 평생을 살면서도 20여분 떨어진 그곳을 처음 오신 분들이 여러분 계셔서 놀랐다.
 물 귀하고 척박한 땅에서 그동안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1년 내내 여러 품종을 재배하느라 더 바쁘고 힘들어졌다. 농사와 함께 바닷 속을 누비던 해녀들은 이제 모두 '할망'들이 됐다. 그런 분들이 언제 편히 여행에 관광을 다닐 수 있으셨겠는가.
 뭉툭하고 수세미같이 거칠한 손을 마주잡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6월 성게 잡을 철에는 성체를 영하려고 내민 손들을 보면 보라색으로 변한데다 가시 자국이 선명해 더욱 가슴이 시리다.
 본당 사진을 정리하다 28년 전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들 신심 봉사 단체인 안나회 사진이다. 당시 60명이나 되는 회원들이 활동했는데 이후 신입 회원은 없었고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실 뿐이었다. 사진 속 할머니들은 이제 허리 굽고, 걷기 힘든 완전한 늙은이가 됐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안나 축일을 맞을 때마다 평생 고생만 하신 안나회 할머니들을 모시고 하루 여행을 떠난다. 지난 여름에는 동심으로 돌아가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계곡으로 모시고 갔다.
 제주 서쪽 지역에는 계곡이 없어 이런 물놀이가 평생 처음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물 튀기며 깔깔거리고, 높은데서 떨어지는 물에 샤워를 하며 연거푸 시원하다고 말씀하시고, 개구리 수영을 하시며 맑게 웃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날 최고 사건은 데레사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모든 옷을 홀라당 다 벗어던지고 오직 팬티 하나만 입으신 채로 물에 뛰어들어 신나게 노셨다. 집에 가기 싫다고, 조금만 더 놀자고 애원하는 모습은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며 빈소를 지키는 자녀나 손자들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한다. 돌아가신 뒤에는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며칠 동안도 아무런 불평 없이 옆을 지키는데, 왜 살아계실 때에 단 하루, 단 몇 시간이라도 함께 모시고 여행 다니는 것이 그리 힘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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