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말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 역시 이런 논리에 빠져 전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가난과 기아, 전쟁 등 사회악에 손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 전 세계의 가난 구제 문제는 둘째치고, 국내에서조차 결식아동과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도와야할지 걱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 빵은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른에게는 간식거리 정도의 적은 양일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오천 명에게는 있으나마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필립보 역시 지치고 배고픈 군중을 염려하시는 예수님께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라며 군중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기 위해서는 바로 돈 계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모습이요.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안드레아 역시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라며 불가능하다는 필립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모두 자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자기들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빠지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두 제자처럼 우리 역시 주님이 지금 함께 하고 계시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내 계산만 앞세워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무대책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고는 어린이가 내놓은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게 합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며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우리 시대 도처에 만연해 있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처럼 세상의 굶주림 앞에 '나 한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무엇이 변할 것인가?'하는 실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작더라도 먼저 믿음을 갖고 봉헌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주 적은 것으로도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인도 캘커타에 큰 고아원을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 일을 하자면 막대한 공사비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부대시설비가 들어갈 터인데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수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준비해 놓으신 돈이 얼마나 됩니까?" 마더 데레사가 주머니에서 3실링을 꺼내 보이며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기자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습니다. "3실링과 데레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3실링과 하느님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분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나도 배고프고 부족하지만 먼저 내어 놓음으로써 기적을 체험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