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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
이탈리아 어느 일간지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성당에 다니면서 3000번 가량 강론을 들었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소! 그러니 그동안 시간 낭비만 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소! 그런 면에서 사제들 역시 헛수고만 한 셈이오."
편지를 받아든 편집국장은 다음 날 '독자 투고'란에 실었고 예상대로 그 내용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러 주에 걸친 논쟁 끝에 마침내 쐐기를 박는 글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왔고 그 동안 아내는 3200번 가량 식탁을 차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수한 식단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 모든 음식이 영양분이 되어 내게 필요한 힘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아내가 식사를 차려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죽고 없었을 것이다."
이후 강론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주 혹은 매일 강론을 듣지만 기억나는 내용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내 신앙의 바탕임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나마 소홀히 한다면 더 큰 혼란에 빠져버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말씀과 강론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분주한 일상 중에서도 강론 준비에 크게 마음을 쏟는 것은 세 끼 식사처럼 말씀과 강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성인의 축일은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지만 김 안드레아 신부는 복자품에 오른 7월 5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인 최초 사제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15살 젊은 나이로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신학을 공부하러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지부가 있는 마카오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10년 만에 사제로 수품합니다. 그리고 김 안드레아 신부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서 1년여 간 성무를 집행하며 신자들을 사목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을 사목하기에는 신부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로운 뱃길을 알아보려고 연평도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순위도에서 관헌에 체포됩니다. 사십 차례 이상 문초와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하고 마침내 군문효수형을 받습니다.
김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지 40여 일이 지나 시신을 수습해서 150리 길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메고 간 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이민식 빈첸시오입니다. 그는 김 안드레아 신부 유해를 모시고 사람이 아무도 안 다니는 험한 산길만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 만에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 최초 신부는 미리내에 안장되었습니다. 놀라운 신자의 신심이고 놀라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 죽음은 그 당시는 한갓 대역무도한 한 인간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분이 태어나신 솔뫼, 그분이 돌아가신 새남터, 그 분이 묻히신 미리내는 모두 거룩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지는 하느님의 승리를 되새기는 장소가 되었고,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전혀 다름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성인으로 모시고 대축일로 경축하는 것은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씀대로 사셨던 신부님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도 그분의 뒤를 따르는 사제들이 한국에만도 4000여 명이 있고 그들이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을 따르는 사제들이 그분처럼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살기를 기도하는 대축일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