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통일을 원하십니까?

namsarang 2009. 6. 22. 23:16

[생활속의 복음]

통일을 원하십니까?


                                           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하면서도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걱정을 떨칠 수 없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끝없이 요구하는 북한 태도에 더 이상의 양보와 인내는 있을 수 없다는 강대국의 강력한 대응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감정이 격화되는 상황일수록 지혜가 필요합니다. 감정에 감정으로, 싸움에 싸움으로 대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결코 없습니다. 무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1950년 6ㆍ25 전쟁은 민족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불신의 벽만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한도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김일성, 북한 괴뢰군…'하면서 북한 못지않게 배타적으로 60년간을 대치했고 그 결과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3-4)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기원합니다. 남북의 평화적 통일은 통일이 가까워질수록 더 절망적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고 더 많은 인내와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많은 시련과 인내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더 힘차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만으로 인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하루는 탁자 위에 널려 있는 몇 개의 고치 속에서 나비들이 빠져나오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고치 구멍이 매우 좁은데 비해 나비 덩치는 상당히 컸습니다. 그래서 나비들이 나오는데 여간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곤충학자는 가위로 고치들의 구멍을 넓게 만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비들은 쉽게 구멍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렇게 쉽게 고치를 빠져 나온 나비들은 덩치도 커 보이고 빛깔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어찌하여 하느님은 고치 구멍을 넓게 만들지 않으셨을까? 내가 하느님이라면 좀 더 크게 만들었을 텐데. 하느님의 지혜가 나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런데 그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좁은 구멍에서 어렵사리 빠져나온 나비들은 이미 날개를 쫙 펴서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자기가 넓혀준 구멍에서 나온 나비들은 도무지 날지를 못하고 자꾸 앞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입니다. 그 녀석들은 안타깝게도 몇 번 날개를 푸드덕거리다가 결국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곤충학자는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연구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고치 안에 있을 때 나비의 모든 영양분은 어깨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양분이 좁은 고치 구멍을 빠져나올 때 계속 뒤쪽으로 밀려서 특히 날개 쪽으로 가서 골고루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날개에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곤충학자가 구멍을 넓혀준 고치에서 나온 나비는 영양분이 어깨에 그대로 몰려 있어서 날개에 힘이 없을뿐더러 앞쪽이 무거워 앞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은 통일 방법으로 기도하고 용서하며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이고, 신부님. 그렇게 해서 언제 되겠습니까? 그냥 힘으로 단번에 밀어 부치는 것이 속 시원하고 성과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이 남북한 60년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입니다. 힘으로 통일을 이뤄 보겠다고 남과 북이 60년 동안 대치했지만 결과는 원수맺음과 이산의 고통, 가난, 그리고 극빈국으로의 전락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서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어두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인내하고 기도해야 하며 사랑 실천이 필요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지듯이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극단적 언행을 삼가고 더 많은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