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경석이의 운 없는 날

namsarang 2009. 8. 3. 21:45

[사목일기]

경석이의 운 없는 날


정혁 신부(살레시오회, 돈보스꼬자립생활관 관장)

   사제가 되기 전, 실습 수사 기간 중에 서울 대림동에 있는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에서 아이들과 지내던 때였다. 이 공동체는 법원에서 6호 판결을 받은 아이들을 재교육을 시켜 가정에 돌려보내는 일을 하는 곳이다.
 어느 날 서초동 법원유치장으로 갔다. 공동체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중학생인데 그날은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워 담당직원에게 물어 보니 부모님이 법원에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은 부모님이 계시면 집으로 훈방조치를 받았다. 아이 이름은 경석이었고 얼굴이 아주 귀여워 오자마자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경석이는 5학년 때 잠시 가출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부모님이 이사를 가버려 부모님을 잃고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
 당시 우리 공동체에는 일주일이 지나야 외출할 수 있는 규칙이 있었다. 어느 일요일, 경석이와 함께 외출을 했다. 집 앞에서 경석이가 손을 잡으며 하는 말이 "신부님!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아세요? 그날은 정말로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진짜 재수가 없었어요. 제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신부님하고 여기에 있을 아이가 아니란 말이예요"라며 자기 속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이래봬도 영등포지역에서 조금 놀던 아이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신부님보다 인생경험이 많을 거라며 소매치기, 날치기, 빡치기, 그리고 고급기술에 들어간다는 안창치기 등 안 해본 것이 없다고 한다.
 자기가 잡힌 날도 한 건을 하려고 배회하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가게 앞에서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입은 중년이 보였다고 한다. 신사복 안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잠깐 빌리는 안창치기 기술을 이용해 지갑을 슬쩍해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 지갑을 펴보았는데…. '아뿔사! 이게 무엇인가!' 지갑을 연 순간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군"하며 뛰려는 찰나 뒤에서 사복형사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갑 안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경찰신분증이었다. 그때는 절도사건이 많아 형사들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던 터였다. 노련하다고 자부한 경석이조차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내게 하소연하는 모습이 참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후 난 경석이 부모를 수소문해 찾았고, 경석이는 집에 머물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더 기쁜 것은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일년이 지난 후, 경석이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믿었던 부모님이 아무 소식 없이 경석이를 떠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석이 부모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몰래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 후 난 공부를 하기 위해 신학교로 돌아왔고 경석이는 근로청소년회관에서 살다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석이에게 정이 들었고 계속 함께 해주지 못한 것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은 20대 중반의 청년이 돼 있을 경석이가 어디에선가 잘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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